집을 그리며
집을 그리며
  • 백향기 대전창조미술협회장
  • 승인 2022.03.13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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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향기 대전창조미술협회장의 '그림이 있는 에세이'
“우리는 집과 분리될 수 없는 통합체로 이해돼야 하지 않을까?”

[대전=뉴스봄] 백향기 대전창조미술협회장 = 요즘은 집을 주제로 그리는 일에 빠져 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그림의 주제나 소재가 조금씩 변해 온 것 같다. 그림의 변화는 의도하기보다는 필자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변해간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오직 한 가지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젊은 시절의 생각이 전혀 변하지 않고 초지일관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듯이 화가의 그림이 변화해 가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림의 소재가 바뀐다고 해서 궁극적인 관심이나 삶의 지향 내지는 태도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필자의 경우 궁극적인 관심은 크게 변하는 것 같지 않다.

필자는 인간이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돼 독립적인 존재로 이해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환경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이고 상호관계를 갖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의 통합체로써 분리 불가능한 존재라고 굳게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살아가는 환경과 분리될 수 없는 나, 주위 환경과 통합체로써의 나라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 자연 속의 소재, 특히 꽃을 통해서 꾸준히 그려온 셈이다.

꽃을 소재로 그리면서 지속적으로 던진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무엇을 꽃이라 하는가?” 꽃잎만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줄기와 이파리를 모두 합해서 꽃이라 하는가? 아니면 꽃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주변의 풀들과 나무들이 함께 할 때 비로소 아름다움을 갖는가, 또는 꽃이 뿌리박고 있는 흙과 작은 돌들을 모두 함께 꽃이라 부르는가? 물론 꽃이란 주변의 모든 환경과 분리돼 존재할 수 없다.

이파리, 줄기, 뿌리박고 있는 흙과 작은 돌들, 주변의 풀잎들, 함께 피어있는 이웃한 꽃들, 나무, 심지어 배경이 돼 주는 하늘까지 모두 합해질 때 우리가 꽃이라 부르는 대상이 생명을 갖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홀로 존재하지 않는 통합적이고 상호작용하는 존재에 대한 관심이 지속돼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상태를 그려 보이고 싶어서 꾸준히 꽃을 소재로 작업을 해왔다. 그런 상태를 필자는 공생적 자연이라 불렀다. 그것은 여전히 필자의 중요한 관심사다.

그런데 인간의 생활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환경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구체적인 일상생활과 사고방식, 감정 등에 미치는 영향은 집과 도시라는 인공환경이 더 압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오히려 오늘날과 같은 도시생활에서는 자연환경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과 포괄적인 관계를 형성한다면, 그래서 다소는 관념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인공환경인 집과 도시는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환경으로 작동하고 일상과 통합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관심의 대상이 됐던 자연과 공생하는 인간이라는 주제에서 인공적인 환경으로 지평이 넓어져서 삶의 환경과 실질적으로 공생하는 통합적 의미의 인간이라는 점에 자꾸 눈이 가는 것이다.

이러한 관심의 변화에는 분명 계기가 있는 것 같다. 우선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은 펜데믹 상황이 지속되면서 아무래도 집에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늘어났고, 이로 인해서 집의 중요성이나 영향력에 대한 민감함이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아마도 그런 영향이 일부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변화는 필자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꾸 어릴 적 추억들이 종종 생각난다. 오늘의 필자가 과거의 필자와 분명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변화가 있었다고 해도 연속적인 변화의 연결선 위에서 변주가 이뤄진 것이고 하나의 연장선에 서 있는 존재임은 분명하다.

백향기 作. 자연을 품은 우주.

그래서 나이 들수록 어릴 적의 기억들이 되새겨지는 것 같기도 하다. 말하자면 오늘의 필자를 만들어 온 시작점에 대한 회고라고 할까? 그런데 어릴 적 생각을 하면 여러 가지 추억들이 생각나지만 대부분 기억은 살던 고향집, 종종 놀러 가던 외할머니 집이 함께 떠오르게 된다.

과거의 기억들이 어떤 행위나 놀이 같은 것만으로 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이뤄진 공간, 구체적으로는 집, 아니면 동네의 모습과 함께 떠오른다는 것이다. 물론 집이나 동네 외에도 주전자 들고 한참을 걸어가 약수물 떠 오던 부소산길, 여름 저녁에 돗자리 깔고 놀던 백제탑도 생각나지만 이것들 역시 모두 특정한 장소와 공간의 모습이 함께 한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집이란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의 한 부분이다. 꽃이 줄기와 이파리와 뿌리박고 있는 흙과 돌 그리고 배경이 돼주는 하늘까지 모두를 포함한 총체성으로서 존재하듯이 우리는 집과 분리될 수 없는 통합체로 이해돼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꽃의 통합성에 비유하자면 사람과 집도 분리될 수 없는 통합체다. 그런 의미에서 우주(宇宙)를 집우(宇)와 집주(宙)로 구성돼 있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우주를 표현하면서 두 글자 모두 집을 의미하는 한자를 사용하고 있다.

어떤 이는 우주를 표현하는 두 글자를 공간과 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어떤 이는 처마와 들보 같은 의미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학술적 설명이 아니라도 집은 나와 통합된 일체이고 단순한 물질로서의 건물이 아니라 정서와 생각들이 함께 버무려져 있는 나의 일부분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가 우주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모든 집이 무조건 필자의 삶과 일체가 되는 통합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어릴 적 고향집과 달리 나이 들어 객지로 나가 살던 집, 결혼해서 이리저리 전셋집을 돌아다니면서 살았던 집들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것이야 1~2년 살고 이사한 집들이니 그렇다고 해도 심지어 최근에 26년을 산 집에서 이사를 했는데 그 집에서의 기억들이 어릴 적 고향집에서의 기억과는 확연하게 느슨하다는 것에 놀라고 있다.

어릴 적 살던 고향집과는 다르게 아파트여서 그랬을까? 아니면 어릴 적 기억과 성인일 때의 기억이 서로 밀도가 달라서일까? 둘 다 상관이 있는 일 같고, 다른 한편으로 집을 사용하는 생활방식 자체가 변한 것도 영향이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우리는 한평생을 살면서 생로병사를 겪어 나가지만 과거에는 이 일들이 모두 집에서 이뤄진 것들이다. 집에서 태어나고, 그 집에서 자라고, 늙어가고 병들어 누워도 그 살던 집에서 눕고 심지어 자신이 태어난 그 방에서 숨을 거두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병원에서 태어나고 늙으면 요양원으로 병들면 병원으로 그리고 세상을 뜨면 장례식장으로 가게 돼 생로병사가 집과는 상관이 없는 일들이 됐다.

집에 대한 기억이 느슨하다는 것은 필자 삶의 궤적이 그것을 담아내는 환경과 분리돼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최근의 집을 그리는 일에 집중하는 것은 필자와 삶과 밀도있게 일체가 되는 집의 모습이나 느낌, 분위기는 어떤 것일까를 찾아보는 작업이다.

그리해 우리가 자연환경에서 유리돼 살아가고 심지어 자연을 파괴하는데 앞장서는 일이 총체성이라는 의미에서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 것과 다름이 아니듯이 이제는 보다 구체적인 생활환경인 집조차도 우리 일상생활과 분리돼 내가 몸둘 곳을 찾지 못하고 둥둥 떠다니는 일은 없어야 할 것 같아 필자의 통합된 한 부분을 이루는 집은 어떤 모습일까를 찾아보는 작업을 새로이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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