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 또 파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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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영주 편집위원
  • 승인 2023.09.08 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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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주의 화가들의 수다] 마네 作_풀밭 위의 점심식사
마네 作, ‘풀밭 위의 점심식사’, 1863.

[대전=뉴스봄] 백영주 갤러리봄 대표 =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날, 자리를 펴고 잔디에 누워 햇볕을 쬐고 있으면 절로 깨끗해지는 기분이 든다. 볕 좋은 날만을 기다렸다가 아무 데나 누워선 온몸에 일광욕을 하는 유럽인들의 마음이 이런 걸까?

그런데 반가운 햇볕을 맞는 일광욕도 아닌, 점심시간의 풀밭에 왠 누드 여인이 있다면 꽤 당황스러울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본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도 그랬다.

파리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마네는 해군이 되기를 바란 부모의 반대를 부릅쓰고 역사화가로 이름을 떨치던 쿠튀르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회화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쿠튀르의 스튜디오에서 회화 수업을 받는 한편, 루브르 박물관 등에서 명화를 모사하는 훈련을 시작했다.

과거의 명작을 모사하는 것은 1850년대 당시의 화가 지망생들에게는 일반적인 훈련이었지만, 마네는 대가들의 작품에 나타난 주제나 구도, 기법 등을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작품 속에서 새롭게 재해석해냈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서도 마네의 이러한 재해석을 살펴볼 수 있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남녀 두 쌍이 강이 흐르는 한적한 숲속에서 목욕과 피크닉을 즐기는 장면을 그렸다. 화면 전경에 등장하고 있는 남녀는 두 거장의 작품에서 따온 것인데, 하나는 티치아노의 ‘전원 음악회’고, 다른 하나는 16세기 이탈리아 판화가 라이몬디가 모사한 동판화로 전해지고 있는 라파엘로의 ‘파리스의 심판’이다.

티치아노 作, ‘전원 음악회’, 1508~1509.
라이몬디 作, ‘파리스의 심판’, 1534.

이 중 특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인물과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인물의 모습은 ‘파리스의 심판’에서 그대로 따온 것이다. 그러나 마네는 이런 전통적인 모티프 속 인물들을 동시대 파리 시민들의 모습으로 그려 큰 비난을 받았다.

화면 전경에 옷을 입지 않은 상태로 그려진 여성은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이나 님프가 아니라 동시대 여성인 ‘빅토린 뫼랑’이라는 것을 당시 관람자들은 불편해했고, 이 여성이 역시 실존 인물들을 모델로 한, 옷을 잘 갖춰 입은 부르주아 남성들과 함께한 것으로 묘사된 데서 부르주아의 위선을 지적당하는 것 같은 당혹감을 느낀 것이다.

관람자들에게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작품의 형식적 측면에서도 파격적이었다. 마네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공간을 묘사하면서, 그 공간 속 여러 요소들의 크기나 위치를 원근법에 따라 조정하지 않았다.

그 덕에 단일 시점의 원근법으로 그림을 봤던 이들은 ‘풀밭 위의 점심식사’ 속 배경에서 공간적 깊이를 느끼기 어려웠다. 예를 들자면, 화면 중앙의 목욕하는 여인은 그 오른편에 그려진 배에 비해 너무 크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대상을 묘사하면서 중간 색조를 과감히 생략했고, 전체적으로 녹색과 갈색을 위주로 채색했다. 그 결과, 화면 속 대상들의 세부 묘사는 단순화되고, 대상의 실루엣이 강조된 반면, 명암의 표현이 최소화되면서 대상들이 평면적으로 보인다.

마치 햇빛 아래서 전혀 부끄러움 없이 일광욕을 만끽하는 유럽인들처럼 그의 작품에도 거리낌은 없었다. 그 탓에 당대 관람자들과 비평가들의 분노를 산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오늘날 모더니즘의 출발을 알린 혁신적 작품으로 여겨진다.

마네 등장 이전, 회화는 어떤 주제를 전달하느냐에 따라 그 우열이 가려진다 여겼다. 그러나 마네는 그림의 주제나 내용보다는 형식적 특성에 관심을 갖게 만들어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이라는 모더니즘의 특징을 예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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