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의 시작
인상주의의 시작
  • 백영주 편집위원
  • 승인 2023.10.20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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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주의 화가들의 수자] 모네_‘인상, 해돋이’
모네 作, ‘인상, 해돋이’, 1872.

[대전=뉴스봄] 백영주 갤러리봄 대표 = 회화사의 한 줄기 획을 그었다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개념인 ‘인상주의’. 하지만 쉬워 보이는 명칭과 달리 필자는 그 의미를 이해하는데 한 참 걸렸다. 빛과 인상이 대체 무슨 관계란 말인가, 그러다 ‘이게 인상주의구나’라고 바로 알게 해준 그림이 바로 모네의 ‘인상, 해돋이’다.

아내인 카미유와 함께 신혼을 즐기던 모네는 1870년 보불전쟁을 피해 런던으로 떠났다. 이때 그는 윌리엄 터너와 존 콘스터블의 그림을 공부했는데, 이는 모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는 터너의 ‘호수 너머의 일몰’이나 ‘난파 뒤의 아침’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전쟁이 끝나고 모네는 최초의 인상파 전시회를 제의·개최했다. ‘인상, 해돋이’는 이 전시회에서 첫선을 보였다. 말 그대로 고향에서 내려다본 항구를 보고 느낀 즉흥적인 인상을 그린 이 작품의 제목은 기획전의 전시 도록을 만들 때 동료들이 제목을 요구할 때 떠오르는 대로 말해준 것이다.

제목만큼이나 이 그림은 단순하다. 주목할 점은 검은색을 사용하지 않는 인상주의 기조가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둠 속에서 해가 막 떠오르는 풍경을 담은 이 그림에는 검은색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검은색을 쓰지 않고도 충분히 어둠을 표현할 수 있다는 건 매우 혁신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실험들은 비평가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제 이 그림은 인상파를 대표하게 됐지만, 처음에 인상주의라는 말 자체가 조롱의 뜻을 담고 있었으니 오죽할까. 비평가 루이 르로이가 모네의 그림을 보고 비아냥거리면서 붙여준 이름이 ‘인상주의’였다. 르로이는 “날로 먹는 장인 정신의 자유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혹평을 쏟아부었다.

그림은 사진처럼 정교하고 우아한 주제를 다뤄야 하는데, 고작 지저분한 항구 풍경을 붓질 몇 번으로 쓱쓱 그려놓고 폼을 잡는다는 거였다.

밤은 검다고 믿는 이들에게 ‘색채는 빛의 문제일 뿐’이라는 설득이 당장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을 터. 모네는 뚜렷한 형상을 통해 풍경을 나타내려 하지 않고 빛과 그림자를 통해 자신이 받은 인상을 그대로 전하려 했다.

그림에서 바다와 하늘을 구분하는 건 색이다. 붉은빛이 도는 하늘과 푸른 바다는 서로 겹치면서도 묘한 대조를 이룬다. 태양이 가장 밝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명도를 따져보면 하늘과 거의 차이가 없다.

모네는 색채와 명도의 관계를 정확하게 표현했는데, 이를 통해 인상주의 그림들이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린다는 근대적 리얼리즘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알 수 있다.

터너 作, ‘호수 너머의 일몰’, 1840.
터너 作, ‘난파 뒤의 아침’, 1841.

인상주의가 등장한 이후 이제 풍경화는 야외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이 내게 남긴 인상을 화폭에 옮기는 작업이 됐다. 이 그림으로 모네는 과거와 결별했다. 당시 인상파 화가들은 독립성과 저항성을 상징했다. 개인전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살롱에 도전한 인상파 화가들의 행동은 곧 대중의 공감과 지지를 얻어냈다.

이들은 정치적 성향이나 사회적 출신도 서로 달랐지만, 오직 그림이라는 매개를 통해 인상파라는 집단으로 묶일 수 있었다.

이들이 공유한 것은 세부 묘사보다도 주제의 본질을 재빨리 잡아내고, 채색도 서로 나란히 겹쳐 칠해 색감들이 서로 섞이게 만들은 것. 회색이나 검은색을 쓰지 않고 대체로 원색을 쓰는 것을 선호했고, 표면 마감도 불투명하게 처리했다. 이런 조처는 야외의 신선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네의 ‘인상, 해돋이’는 인상파 화가들의 기법을 요약·정리해 놓은 것만 같다. 밝은색으로 어두운 분위기를 그려낼 수 있다는 걸 정확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상파를 대표하는 그림으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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