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로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거울로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 백영주 편집위원
  • 승인 2023.12.25 15: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백영주의 화가들의 수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피카소 作 ‘시녀들’.

[대전=뉴스봄] 백영주 갤러리봄 대표 = 예전에 필자가 본 우리나라 공포영화 중 가장 섬뜩했던 건 ‘거울 속으로’라는 영화였다.

혼자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갑자기 고장이 나서 멈추고, 어둠 속에서 거울 속 또 다른 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마주보더니 거울 밖의 진짜 나까지 조종하는 장면 때문에 한동안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면 거울을 못 보고 애꿎은 층 표시만 뚫어지게 봤다.

그런 섬뜩한 옛 추억에 비하면 거울을 적극 활용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은 보기에 매우 사랑스러운 그림이다. 한가운데의 귀엽고 어린 마르가리타 공주가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림 속 등장인물들은 다양한 세계에서 하나의 그림 안에 나타난다. 그림 속의 주인공인 마르가리타 공주, 그녀를 돌보는 두 시녀, 옆의 두 난쟁이, 뒤의 왕비의 시녀장과 수행원은 그림 안에서 온전히 존재하고 있지만 그림 밖의 세상, 혹은 붓을 한창 작업 중인 초상화의 모델이 되고 있는 국왕 부부를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은 화가 벨라스케스 자신과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왕비의 시종 그리고 그림 속 거울, 혹은 그림 밖의 현실에서 관찰자가 되는 동시에 그림 속 화가의 모델이 되고 있는 마리아나 왕비와 국왕 펠리페 4세가 있다.

이 작품은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와 면밀한 관찰이 결합된 사실주의에 의해 그려지는 벨라스케스 초상화의 전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는 서로 다른 신분에 속한 사람들의 다양한 조건, 직업 및 외모를 정확하게 옮기면서도 이들이 자신이 만든 세계 안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게다가 그림 속 모든 이들의 시선은 관찰자인 ‘나’를 향하고 있어 마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궁중의 일원이 된 듯 착각까지 불러일으킨다.

거울과 열린 문을 통해 공간을 확장시키는 방식은 벨라스케스가 다른 장르의 그림들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방식이다. ‘거울을 보는 비너스’에서는 농염한 뒷모습 누드와 함께 여인의 흐릿하고 고혹적인 시선을 에로스가 들고 있는 거울을 통해 나타냈다.

‘아라크네의 우화’에서는 전경에서 노파로 분한 아테나와 아라크네의 베 짜기 대결을 보여주는 동시에 후경에서는 아라크네가 제우스를 모욕하는 내용의 태피스트리를 짜자 이를 벌하는 아테나의 모습을 그려냈다.

시간차를 두고 생겨난 두 가지의 사건을 자연스럽게 하나의 그림 안에 녹여내 실로 경외감까지 들게 하는 작품이다.

다시 ‘시녀들’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현실과 상상, 거울과 그림 속 세계, 그림 밖의 세계가 묘하게 결합된 걸작으로 평가받는 ‘시녀들’ 속 모델인 마르가리타 공주와 스페인 궁정화가로 평생을 바친 벨라스케스의 인연은 그녀가 태어났을 때부터 시작됐다.

펠리페 4세가 아이를 모두 잃고 둘째 왕비 사이에서 얻은 첫 딸인 마르가리타 공주는 왕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그녀는 두 살 때 삼촌이자 합스부르크 왕족인 레오폴드 1세와 혼인하기로 약속이 돼, 오스트리아 왕실에서는 어릴 적부터 그녀의 초상화를 보내 달라 요청했다.

라헐 판 코에이 著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표지.
라헐 판 코에이 著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표지.

공주의 초상화들은 그녀가 외형적으로 어떻게 성장하고 변화하는지를 관찰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벨라스케스는 ‘분홍 가운을 입고 있는 어린 마르가리타 테레사’, ‘푸른 드레스를 입은 마르가리타 공주’ 등을 그려 1654년부터 1659년까지 총3점을 비엔나로 보냈다.

왕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실은 마르가리타 공주의 삶은 그렇게 행복했다 볼 수 없을 것이다. 대를 거듭해 이어진 근친혼으로 주걱턱이 점점 심해져 음식을 제대로 씹을 수조차 없게 됐고, 14세에 신성 로마제국의 황후가 돼 넷째 아이를 낳다가 22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어릴 때는 순수한 동경으로 바라보았던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이, 공주의 마지막을 생각하니 조금은 서글프게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애정 어린 터치가 가득한 현실과 그림, 그림 속 거울을 넘나드는 벨라스케스의 초상화가 여러 사람의 뇌리에 박혀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것일까? 라벨은 벨라스케스의 이 그림을 보고 영감을 얻어 궁정무곡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만들었다고 한다.

천재 화가 피카소는 말년에 ‘시녀들’을 패러디한 연작만 수십 개를 그려 자신만의 ‘시녀들’로 재해석을 시도했으며, 또 초상화 속 개가 실은 공주의 인간개 노릇을 하던 난쟁이였을 거라는 상상을 바탕으로 한 라헐 판 코에이의 소설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와 아름다운 공주 대신 난쟁이 추녀에 주목한 박민규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까지. ‘시녀들’은 예술가들에게 영원히 마르지 않는 영감의 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