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초월한 감성 ‘피에타’
시대를 초월한 감성 ‘피에타’
  • 백영주 편집위원
  • 승인 2024.01.0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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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주의 화가들의 수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vs 2000년대 재해석된 ‘피에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대전=뉴스봄] 백영주 갤러리봄 대표 = 지난 2012년 영화계에 화제가 됐던 김기덕 감독 영화 ‘피에타’는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영화 ‘피에타’의 포스터는 극 중 엄마 역으로 나온 조민수가 아들역으로 나온 죽은 이정진을 흘러내리듯 안고 비통의 슬픔에 젖어있는 모습이다. 이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의 모습과 같다.

피에타(Pieta)는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비탄에 잠겨있는 모습을 묘사한 양식이다.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무릎 위에 얹어 어깨를 받치고 가슴에 껴안은 모습은 사람이 가장 소중한 것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피에타(Pieta)’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러한 피에타의 모습에는 종교적인 의미를 넘어 자신의 몸으로 존재케 한 또 다른 자아에 대한 상실감을 그린 인간의 본연적 감성으로 이해되는 시대를 초월한 소재이기도 하다.

르네상스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예수의 몸을 성스럽고 아름답게 표현해 그 진수를 발현시켰다. 예수를 바라보는 성모 마리아의 눈길 속에서 미켈란젤로의 성모마리아는 어머니로서 슬픔이 진실됨을 이야기하고 이것은 관람객의 가슴에 슬픔을 호소한다.

이렇게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예수를 잃은 상실의 고통을 정교하고 세밀한 표현으로 구현해냈다. 마치 실재모습으로 착각하리만큼 세밀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종교적 경건함과 인간적 감성까지 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피에타는 르네상스 조각의 정수를 넘어 시대를 초월해 지금까지도 보편적인 감성이 다각도로 재해석 되고 있다. 피에타의 뜻인 ‘자비를 베푸소서’는 운명과 맞닿아 있는 인간의 삶에 상실의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상실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사람들에게 조금은 다른 감성이나 의견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피에타’ 포스터.

김기덕 영화의 피에타를 보면 자녀를 잃은 상실의 슬픔을 현대의 극적인 자본주의의 형태와 결부시켜 복수와 또 다른 상실을 낳게 된다. 그 상실은 어쩌면 진실이 아닌 마치 허구 속에서 일어나는 것 같다.

극 속에서 엄마인 조민수는 자신의 진짜 아들을 죽인 고아인 이정진에게 자신이 진짜 엄마라고 하며 찾아가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폭력적으로만 인식하고 있던 이정진에게 조민수는 갈등이자 동시에 빛과 같은 존재로 다가선다. 결국 조민수가 자신의 진짜 엄마임을 인식하게 되고, 조민수는 자신으로써 최고의 복수인 엄마의 죽음을 아들 이정진에게 보여줌으로써 복수의 정점을 찍게 된다.

르네상스 시대의 피에타에선 죽은 예수(아들)를 안으며 슬퍼하는 성모마리아로 자식을 잃은 상실을 나타냈다면, 영화 피에타에서는 자식을 잃은 상실감을 하나의 복수의 형태를 옮겨 놓았다.

감독은 상실의 아픔을 다만 신의 뜻에 따라야 하지만 운명의 비통함에 슬퍼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 이러한 표현은 아마도 이전의 피에타의 모습일 것이다.-

김기덕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 관해서 이야기하길 자본주의의 극대화된 잔인성에 대해 담았다고 한다. 이것은 어떻게 해서든 돈을 받아야 하는 사체업자인 이정진이 잔인하게 사람을 죽여가며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을 있게 한 근본적인 뿌리인 어머니란 존재의 부재가 그 일단계이며, 목적이 전도된 사회로부터의 학습이 두 번째가 아닐까 싶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맹점이며 감독의 신랄한 비판일 것이다.

이러한 시대성에도 불구하고 피에타의 기본적인 인간감성이 영화에 충분히 녹여들어 관람객에게 같은 슬픔을 주는 것은 조민수가 자신의 진짜 엄마이건 아니건 간에 자신을 있게 한 성스러운 존재로 인식하고 믿게 되는 순간 이정진에게는 말할 수 없는 큰 변화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자신의 엄마가 자기의 과오로 인해 죽게되는 상황이 오자 냉혈한 같던 이정진도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해 모든 자신의 죄를 겸허히 받아들여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뿌리를 잃은 자의 상실감을 가장 극적으로 잘 표현한 것이다.

과연 관람객은 극 중 이정진에게 온갖 악을 저지르는 패륜아라고 손가락질만 할 수 있을까. 엄마를 잃은 상실감은 그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슬픔을 주고 그것이 가진 힘이 굉장히 크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이용백의 ‘피에타’

영화 피에타 말고도 예술작품으로 현대의 피에타를 재해석한 작품도 있다. 작가 이용백은 사이보그 인형 피에타로 현대의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한다. 이용백의 피에타는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사이보그와 반사 유리로 덮여진 상자로 이뤄져 있다.

성모 마리아는 유리상자 위의 허공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대좌에 앉아있지도 않고, 예수를 안고 있어야 할 손과 가슴은 비어 있다.

조각으로 아름답게 표현되었던 미켈란젤로의 마리아와 달리 이용백의 마리아는 무감각하다. 마리아의 손이 텅 비어있고, 피에타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죽은 예수가 빠져있다. 성모 마리아는 반사유리에 비추었을 때 비로소 똑바른 모습으로 드러나며, 실재 조각에서 빠져 있는 예수의 모습 또한 반사 유리를 통해서 영상으로 드러난다. 반사된 유리 안쪽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예수의 영상은 거울에 비친 마리아의 손안에서 연기처럼 구현된다. 이렇게 이용백의 작업에서는 실재는 불완전하며 거울 속에서 진짜가 나타난다.

작가는 평면적으로 투사되는 거울 속의 영상과 흔들리는 예수 이지미를 통해 마리아가 안고 있는 것이 환영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서 예수는 마리아의 삶의 정수였지만 이용백의 피에타에서 예수의 위치를 차지하는 사이보그는 실재하지 않는 허구이며 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허무한 환영이다. 그곳에는 진짜도 없고 감동도 없는 것이다.

이용백의 피에타에서 느껴지는 상실과 슬픔은 소중한 것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이라기보다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린 마리아의 슬픔인 것이다. 작가는 가짜를 부여잡기 위해 허공에 손을 내밀고 있는 마리아는 상실을 해야 할 대상조차 잃어버린 우리 자신의 삶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상실을 하기 위해서는 만질 수 있고 껴안을 수 있는 진짜가 필요한 것이다. 이용백이 말하는 피에타의 슬픔은 상실의 실체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피에타를 둘러싼 인간의 감성과 시대성은 보편적이며 특수함도 가지고 있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감흥을 일으킬 수 있는 소재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도 김기덕의 피에타도 이용백의 피에타도 기본적인 본체에서 사람들에게 각기 다르게 인식되며 감동을 준다. 시대를 초월한 감성 피에타, 앞으로의 시대에 나올 피에타도 은근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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