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끈 것은 삶이 아니라 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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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영주 편집위원
  • 승인 2024.01.21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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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주의 화가들의 수다] 세잔_벨뷔에서 본 생 빅투아르 산
세잔 作, ‘벨뷔에서 바라본 생 빅투아르 산’, 1885,

[대전=뉴스봄] 백영주 갤러리봄 대표 = 등산은 이제 중·장년의 은퇴 후 취미를 넘어 아웃도어 룩의 유행을 타고 젊은 층도 즐기는 ‘생활’이 됐다. 주말에 가족끼리 가볍게 동네 뒷산을 오르는 경우부터 전문 장비를 두르고 험한 산의 정상을 정복해가는 경우까지 등산의 종류는 다양하다.

등산을 즐기는 이들 중에는 유독 하나의 산을 좋아해 즐겨 오르는 이가 있는데, 세잔 역시 생전에 생 빅투아르 산을 여러 번 올랐다.

생 빅투아르 산은 폴 세잔이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일생동안 탐구했던 소재였다. 세잔은 한 번 빠져든 주제는 평생에 걸쳐 여러 점의 연작을 그리곤 했는데, 생 빅투아르 산 또한 그가 본격적인 예술활동을 시작한 1877년에서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소나무와 생 빅투아르 산’ 등 수십 점의 연작으로 그려져 세잔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모티브 중 하나로 여겨진다.

생 빅투아르 산은 남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 근교에 있는 지중해의 작은 마을 레스타크에 있다. 레스타크는 그가 수없이 이사 다녔던 방황기에도 가장 애착을 가졌던 곳이고, 아버지와 화해하고 부인과 결혼해 안정을 찾게 됐을 때도 오랜 시간을 보낸 그만의 안식처였다.

세잔은 죽기 전까지 이 산을 오르며 평생 자신이 남긴 발자취를 좇아나갔다. 초기에 산은 주제가 아닌 풍경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 가운데 하나로 등장했다가 점차 세잔 회화의 중심 주제가 돼갔다.

‘벨뷔에서 본 생 빅투아르 산’은 ‘생 빅투아르 산 연작’의 첫 번째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작품은 나무들 사이에 높게 솟아 올라있는 생 빅투아르 산을 그린 그림이다.

세잔의 붓질은 개별적으로 나눠짐과 동시에 통일성 있는 전체를 이룬다. 세잔은 산과 하늘을 모두 같은 범위의 파란색으로 칠해 놓았다. 따라서 그림의 1/3 정도에 지나지 않는 집들과도, 전경에 뭉쳐 있는 찍어 바른 듯한 잎사귀들과도 분리돼 있다.

이처럼 자연을 하나로 일원화하는 ‘벨뷔에서 본 생 빅투아르 산’은 세잔이 자연에 부여한 시각적 정확성과 엄밀함을 보여준다. 거대한 하나의 형상을 조각으로 분리해 묘사하면서도 일체감을 살리는 표현은 입체주의에 영향을 줬다.

세잔은 자연을 단순화시킬 때 기하학적 모양으로 변하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는데, 예를 들자면 통나무는 원기둥으로, 사과와 오렌지는 구로 환원하듯이 자연을 원기둥·구·원뿔로 재구성하고 싶어한 것이다.

생 빅투아르 산은 삼각형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실은 세잔은 산을 그렸다기보단 삼각형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림 속 사물, 즉 산의 본성을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닌 자기만이 파악한 산의 본질을 그리고자 더욱 단단하게 사물의 형태를 단순화시킨 것이다.

산악인들은 수많은 위험한 순간을 겪고도 계속 산에 오르는 모습을 자조하듯이 ‘산에 미쳤다’고 표현한다. “단 한 번도 나를 이끈 적이 없던 삶, 그러나 너무도 쉽사리 나를 이끈 것은 바로 산이었다”며 죽을 때까지 생 빅투아르 산을 담기 바빴던 세잔 역시 그 속에 담긴 자연의 본질을 담고자 그야말로 산의 에너지에 이끌려 붓을 놀리기 바빴던 것이다.

세잔 作, ‘커다란 소나무와 생 빅투아르 산’, 1885~1887,
세잔 作, ‘커다란 소나무와 생 빅투아르 산’, 1885~1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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