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의 색채 중심으로 패러다임을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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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영주 편집위원
  • 승인 2024.02.11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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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주의 화가들의 수다] 세잔_정물 시리즈
세잔 作, ‘사과와 오렌지’, 1895~1900.

[대전=뉴스봄] 백영주 갤러리봄 대표 = ‘우리나라 입시 미술’에 대해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대부분 아그리파 같은 그리스 조각상과 병, 과일, 꽃이 뎅그러니 놓인 정물화를 떠올릴 것이다.

주로 뎃생과 구도 위주의 기본 테크닉을 보는 분야다. ‘정물’하면 생각나는 대표적인 화가는 바로 세잔인데, 그의 정물화는 구도는 물론 색채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세기 후기 인상파 화가들은 순간 변하는 태양광에 주목하는 기존 인상파 화가의 화법에 싫증을 느끼고 사물의 구조와 형상에 더 관심을 가졌다. 주제 면에서도 파리의 화려한 카페나 사교장, 선상파티와는 다른 것을 추구했는데, 그중 세잔은 ‘근대회화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다방면에서 새로운 족적을 남겼다.

오랫동안 플랑드르 미술에 감명을 받았던 세잔은 그들과 유사한 색조로 정물화를 그렸다. 가장 잘 알려진 세잔의 정물화는 ‘사과와 오렌지’로, 이 작품은 ‘무미건조한 주제를 위대한 미술로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고 있다.

왼쪽에 놓인 과일접시와 가운데 솟아오른 과일그릇, 오른쪽 화려한 포트의 시점이 각기 다른데, 한 시점에서 대상을 포착하는 전통적인 원근법에서 벗어나 여러 시점에서 대상을 묘사하는 이런 독특한 방식은 입체주의를 비롯한 이후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세잔의 정물화 중 가장 화려함을 자랑하는 작품을 통해 세잔은 각 정물에서 발산되는 풍성함과 다채로움을 매우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특히 이전부터 화면 구성에 안정을 가져다줬던 테이블의 직사각형 틀이나 뒤쪽의 벽이 주는 평면감은 사라진 대신 풍성하게 접힌 식탁보와 소파의 천이 공간 전체에 드리워져 있다.

이로 인해 전통적인 수직·수평적 구성이 보여주던 안정감을 벗어나 마치 정물이 화면 중심으로 쏠리는 듯한 역동적인 구성 효과를 보여준다. 이런 불안정한 구도 속에서도 각 과일들과 그 배치는 매우 단단하고 견고해 보인다.

또한 그는 기존 인상파의 광선에 따른 색채 변화가 회화의 기본요소인 형태와 구성을 망치는 것이라 보고 ‘사과’ 등의 사물을 통해 인상주의를 뛰어넘고자 했다. 사과는 보는 각도와 빛에 따라 다양한 색으로 우리 눈에 보이지만, 세잔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사과 고유의 형태를 그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눈에 보이는 실제적인 색이 아닌, 색을 이루는 무수히 많은 조각들을 계산된 위치에 적용, 입체학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색채분할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세잔 作, ‘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 1890~1894.
세잔 作, ‘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 1890~1894.

또한 전통적인 명암과 원근법을 포기하는 대신 사물이 갖고 있는 고유의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인위적인 명암을 만들었다. ‘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에선 탁자의 왼쪽이 오른쪽보다 내려가 있고 보자기 위 과일의 명암과 병에 반사된 빛의 방향을 통해 그림의 중심부분은 정물의 정면에서 바라본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오른쪽 접시의 빵은 왼쪽 위에서 본 것처럼 그려 사물들 각자의 입체감을 표현했다.

세잔은 동시대의 고갱처럼 인생의 말년에 재능을 폭발시키거나, 고흐처럼 광기를 표출하진 않았다. 오히려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유산을 물려받고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 작품에서도 확 눈에 띄는 무언가를 발견하긴 어렵다. 오히려 수많은 정물의 나열을 보고 있자면 단조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위대한 천재화가로 불린 피카소가 “나의 유일한 스승”으로 칭했던 이유는 바로 유동적인 빛을 단단한 사물에 가두기까지 끊임없는 연구와 고민을 거듭해 독창적인 영역을 개척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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