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원 확장의 공간적 텍스트 ‘설치미술’ 어떻게 봐야 하나?
4차원 확장의 공간적 텍스트 ‘설치미술’ 어떻게 봐야 하나?
  • 류환
  • 승인 2020.06.03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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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미술’에 대한 담론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서양화에서 회화+조각=미술?, 이러한 공식은 이미 예술가나 관람객들의 매력에서 벗어난 지 오래됐다. 선진국에선 더욱 그렇다.

오늘날 미술의 시작은 서구의 모더니즘(modernism)이라는 기조로 1920년대에 일어난 근대적인 감각을 포함하는 예술상의 여러 경향으로서 나타났으며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poste modernism)은 1960년대에 미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문화운동으로서 정치, 경제, 사회의 영역과 한 축으로 이어지던 당시대의 이념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사에 일컬어지는 현존이나 현존하는 사물들을 총칭해 아트라 불리는 컨템퍼러리(contemporary)라는 의미마저도 전통이라 할 만큼 시간을 다투며 그 영역을 넘어서 무한으로 가고 있다.

무한한 영역으로서의 변천확장

위시로 현대예술은 창조라는 차원에서 경계와 장르의 개념을 벗어나 탈 평면, 탈 조각, 나아가 장르 간의 복합적, 혼성적, 융합적인 조형방법이 넓고 빠르게 위세를 떨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예술에서 불리는 현대라 일컬어지는 단어와 개념을 짚어보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물론 현대라 불리는 용어는 서양에서부터 출발했다. 영국의 문화이론가인 윌리엄스(Raymond williams, 1921~1988)의 주장에 따르면 현대의 영어단어 모던(modern)은 저우스트 나우(just now) 즉, ‘지금 당장’이라는 의미를 갖는 프랑스어에서 유래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영어상의 어감은 오히려 우리가 요즘 소위 말하고 있는 '현재 또는 현존하는 사물(Somethng existing now, just now)' 의 의미로써 '컨템퍼러리(Contemporary)'에 더욱 가깝다고 말한다.

현대와 고대(ancient)의 대비는 르네상스 이전부터 이미 흔하게 나타났으며 고대와 현대 사이인 중세기 역시 15세기에 정해졌다고 요약하며 현대에서 파생된 현대주의, 현대주의자, 현대성 등 용어는 17~18세기 이후 발전했지만 현대화(modernize, modernization)는 19~20세기 이후에 이르러서야 통용됐다고 내다본다.

미술을 수용한 모든 장르간의 개념

이로써 내일도 과거가 되는 최신의 예술영역에서 보다 수준 높고 위용 있는 작품들은 창작의 새로운 기법이 요구되고 있으며 그 작품이 제작되는 외부의 환경적인 요소들과 형성돼 가는데 있어 관계성이 매우 밀접하게 작용되는 이유가 관건이 된다.

이는 ‘물건으로서의 작품’에서 ‘공간으로서의 작품’으로 이행을 실감하는 것이 설치미술(Installation)의 특징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며 설치미술은 어느 특정 미술장르를 지향하거나 추종하는 예술적인 용어가 아니고 미술을 수용하는 모든 장르의 이즘을 넘어설 수도 또는 철저히 배제할 수도 있다는 개념의 예술이다.

따라서 이것은 엄연히 작가가 작품을 창조해 창작하는 미술의 한 방법론이고 이를 보는 미술평론가들의 분석과 많은 미술작가들이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하다.

문제는 현대미술의 영역 안에서 이러한 특징들을 비중 있게 다뤄지며 형성돼 가고 있다는 점이 설치미술의 중심에서 차지하는 무개이다.

문화적 맥락을 잇는 복합적, 혼성적의 설치

주지하시다시피 설치미술은 2차원 평면에 매달렸던 모더니스트들의 한계를 넘어선 4차원 공간의 담론으로 설치미술의 개념과 미술사적 전개 그리고 설치미술의 동향을 짚어보면 접근이 용이할 수 있다.

이 예술작품 창작활동의 반경은 다양한 장르의 범주를 확장하며 인접분야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개별 장르의 고유성에 도전한다. 또 그것은 예술의 자율성에 기인해 다른 문화적 맥락 간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복합적이고 혼성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추상이거나 가상의 차원이 아니라 실제적인 시간과 공간을 작업의 재료로 삼음으로써 예술의 과정 및 인간의 삶과 만나게 하려는 인간의 욕망과 관계한다.

따라서 실제로 미술작가들은 이제 재료로부터 혹은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이것은 작가에겐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하는데 그만큼 고정관념의 형식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감을 사서 쓰던, 페인트를 사서 쓰던, 석고로 주물을 뜨던, 또 땅바닥에 기중기 같은 기계를 사용하던 작가는 내가 화가일까, 조각가일까, 연출자일까, 고민하지 않아도 예술가라는 범주 안에서 미술을 탐미하는 설치미술작가라는데 토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이유 중 하나가 텍스트(Text)의 사이트(Site)에 대한 관심이 중점이 되기 때문에 그러하다. 더불어 중요성이 강조되는 몇 가지를 예시한다.

현대문명을 주제로 류환 작가의 설치미술 작품.
현대문명을 주제로 류환 작가의 설치미술 작품.

텍스트의 사이트에 대한 담론

첫째는 앞서 말했듯 사이트(Site)는 단순한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장소의 의미가 첨예하게 살아나는 현실성, 사실성, 현실감이 부여되는 곳이라야 사이트가 확장되는 리얼리티의(reailty) 장소가 된다.

그래서 사이트의 개념은 단순히 환경(대지)만이 아니라 모든 문화와 역사적 맥락에서 적용될 수 있다. 그 공간의 의미를 새로이 형성한다는 전제에서 갤러리나 미술관, 공공건물, 종교의 구조물 혹은 거리의 동상 자체도 사이트가 될 수 있다.

두 번째는 미디어(media)에 관한 관심이다. 이는 우리가 여러 가지 처해있는 새로운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간의 척도가 우리를 둘러싼 환경의 규모와 인간의 생체리듬과 운동속도에 근거했던 시간개념은 말과 글로 전달되는 정보의 의미 등이 깨져버린 오늘날 전자미디어가 이 모든 것을 재조작하고 있기 때문에 미디어 속성의 중요성과 함께 설치작품이 제시하는 미술사적 이념들이 중시돼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에 그러하다.

셋째는 대립관계에서 설치미술의 담화(dialogue)다. 과거처럼 모든 작품이 작가에게 혹은 관람자에게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객 자신도 육체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개입할 것을 요구한다.

이 쌍방적 담화에 대한 관심은 어쩔 수 없이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시해 강조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주재가 추상적이기보다 설명적으로 부각되기에 중요성이 강조된다.

구조물을 통한 이해와 말 걸기

2년마다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리는 국제미술전람회는 미술인들에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베니스 비엔날레(Venice biennale)로서 국가별로 전시관이 마련되며 개최된다.

격년제로 열리는 전람회로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다양한 작가들을 선별하고 사전심의해 참여하는 미술행사로 유명세가 가장 치열하게 높다. 행사가 진행될 때마다 주최 측에서는 이를 알리기 위해 우선권을 갖는 것이 통례적이다.

여기에 참여한 독일의 작가 ‘한스 하케(hans haacke)’는 독일관 전체를 바닥에 파편만 남기고 모든 것을 철거한 후 입구에 히틀러의 사진을 걸어 놓았던 설치미술은 전시장 자체를 사이트로 삼아 통일 독일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말을 걸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공공건물이나 기념비 혹은 미술관 외벽에 구걸하는 걸인의 모습이나, 서로 체인에 묵인 소련과 미국의 미사일을 이미지로 투사해 그 장소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 질문하는 폴란드 출신의 ‘크리츠토프 워지코(krzystof wodiczko)’는 미디어 기술을 이용해 건축물의 그 자체로 비정치적인 표면을 질문의 장소로 활성화했다.

또 미국의 설치미술가 ‘바바라 쿠르거(Barbara kruger)’나 서양화가 ‘제니 홀저(Jenny holzer)’는 광고의 전략을 빌어 여성상의 이중지배구조의 경험담이나 비디오아티스트였던 ‘비토 아콘치나(bitoaconthina)’의 비디오 영상 등을 비춰 설치하기도 한다.

일본의 ‘타다시 기와마타(tadashy kawwamata)’ 도쿄대학 교수이자, 작가는 자동차 모양의 집들을 짓는 것인지 허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구조물들을 통해 기존 건축의 상투적 이데올로기에 도전해 설치한 바 있다.

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설치미술작가로 활동하는 강원도 영월출신으로 홍익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한 ‘이불(Leebull)’의 설치미술은 도발적인 여성주의와 디스토피아적인 염세주의 작품으로 희귀하고 어찌 보면 괴물 같은 작품들을 전시장 천장에 매달아 선보이기도 한다.

다차원적인 공간으로서의 해석

따라서 설치미술가나 미술작가들의 작업방식과 내용들은 너무나 다양해서 지면에 구체적으로 모두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공간에 대한 관심확대가 뚜렷하다는 점이다.

현대 예술사에 있어 평면이 2차적인 담론이었다면 설치미술의 텍스트는 4차원적인 공간의 확산이라고 해석될 수 있으며 이 공간은 창작자들의 고정된 논리를 재현하는 측면보다는 그 공간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해석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을 중시하는 이유이다.

어떤 작품이 고정된 논리로 해석돼 진다면 이는 현대예술에 있어서 의미 없는 한낱 낱말에 불과하다. 차라리 작품으로 오리지널이 아닌 다른 것들이 서로 부딪치고 섞이고 혼합된 다차원적인 공간 속에 창작자는 없고 감상자만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한 것이 설치미술이다.

오직 그 텍스트를 읽는 사람들만이 각자의 상상에 해답을 얻으며 작품으로서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바른 자세일 것이다.

왜냐하면 설치작가들이 주도하는 공간은 오브제가 놓아지는 3차원의 공간을 넘어서 사회, 문화, 역사 등 정치적, 사회적, 환경적 영역으로까지 확대되는 인식론적 공간이며 전통적인 시각미술이 도외시했던 시간의 측면까지 관여하는 다차원적이면서 또 다른 폭넓은 공간으로 제시하기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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