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달(月)의 몽상
잔인한 달(月)의 몽상
  • 류환 전문기자
  • 승인 2021.04.30 09: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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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환 作.

[대전=뉴스봄] 류환 전문기자 = 비가 내리고 바람 부는 새벽이었다.

희뿌연 한 어둠이 아직 그대로 정지한 가운데 촛불만이 유리관 속에서 희미하게 마당 한쪽을 비추고 있었다.

어느 한 여인이 성당 가장자리 옆 높게 서서 밑을 내려다보고 있는 성모 마리아상 아래서 시린 허리를 굽히며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었다.

무슨 간절한 애원(哀願)이었을까?

비바람 부는 새벽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문을 외우는 중년 부인의 애타는 심정은 누구를 혹은 무엇을 위해 그리도 간절한 모습이었을까?

고민이 많고 깊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자신만 알고 있는 딱한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시간을 다투며 불치병을 않고 있는 중환자가 생을 포기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절망에 빠진 위중한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닐까?

모두가 잠이 들어 고요가 늪처럼 아마득해 아직은 동이 트기 멀었는데

저 홀로 잠 못 이루도록 세상 혼자돼 어깨 무거운 책임이라도 져야 하는 모습은 왜 그리 안타까워 보였을까?

무겁도록 땅을 딛고 기도하던 그 여인은 아마도 서둘러 여명(黎明)이 트기 전 아무도 모르게 흔적을 지우고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질 것 같은 예감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죽도록 사랑하지 않으면, 입술이 부르트도록 사무치지 않으면, 애가 타도록 간절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처절한 여인의 뒷모습에 겹치는 어두운 그림자는 무엇을 드리우고 있을까?

지난해 가출한 아이의 전단지(傳單紙)를 전신주에 붙이던 까닭도, 바람난 남편 소식 끊어진 오래된 세월도, 기도원으로 가신 친정아버지 눈동자에 맺히던 눈물도,

몸에 달라붙는 여우 풀 같은 빈곤(貧困)의 굴레는 여기저기 얼기설기 폐가의 부엌 천정에 그을음을 뒤집어쓰고 매달린 거미줄처럼 맥없이 너풀거리고

밤을 낮처럼 털어내도 낮을 밤처럼 떼어내도 지난날들은 결국 시퍼런 상처로 자국만이 무성할 터,

곡기(穀氣)를 끊고 버텨오는 동안 혼자만 끌어 앉고 통곡하는 심정은 타다남은 장작처럼 시커멓게 타들어 간 숯덩이 가슴과 뼈만 남은 삐쩍 마른 육신뿐

시간이 지나면 모든 사실이 생선 가시처럼 드러나 여기저기 이구동성 비를 이끄는 먹구름처럼 민둥산 위로 한차례 소나기가 밀고 올 천둥과 번개

점점 어둠이 걷히고 슬그머니 흐릿하게 밝아오는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다급한 전화벨이 울리고 초인종이 울릴 때마다

사시나무 떨듯 오금이 저리는 초조한 마음을 쓸어내리는 그녀의 앞자락에 쏟아지는 슬픈 비보(悲報)들

넋 잃은 등줄기에 찬물을 끼얹듯 소름 돋는 어지러운 출혈로 쓰러지면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빛나던 흐릿한 유등(油燈)

이제 아득히 반짝이는 빛도 어디에도 남김없이 이미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한줄기 유성(流星)이 떨어진 차가운 파란빛

그 뒤로 하염없이 밀려오는 서글픈 이별의 통한과 마지막 기적을 울리며 흩어지는 메아리의 소용돌이

푸시시 헝클어진 머리채를 들고 유리창 넘어 사선으로 굴절된 회색빛을 향해 이마에 손을 짚고 비틀거리며 따라가면

매캐한 매연 속 넘쳐나는 문명의 폐기물들과 기계음만 난무한 채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생명 들이 쓰러져 죽어가는 도시에 쏟아지는 새들의 깃털들

새벽이 되면 어김없이 무거운 현관문을 밀고 나가는 것도 힘겨워 늘어진 어깨에 쌓이는 근심과 우체통을 비집고 나오는 뻘겋게 찍힌 기간 지난 체납(滯納) 통지서

언제였던가! 오래돼서 기억도 아물아물한 그 시절 아이들 앞세운 소풍 길 가족 나들이

지금도 선명한 푸른 잔디밭 토끼풀 엮어 목걸이 만들고 행운의 네 잎 클로버 찾아 깔깔거리던 웃음소리를 다시 한번 들을 수 있다면

멍하고 턱 괴고 상념에 젖다가 가족사진과 키 작은 아이들의 옷을 매만지며 허무한 그리움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을 때 엄마! 하고 부르는 외마디

순간 등에 벼락을 치듯 중추신경에 대못을 박는 수천 볼트에 감전된 가슴 멎는 전율로 혼비백산(魂飛魄散)하는 경풍(驚風)

벌떡 일어나 현관문을 열어보니 어설픈 봄비 처량히 내리는 새벽녘 비상등을 번쩍이고 사이렌을 울리며 질주하는 응급차량

이마를 훔치고 한숨을 쉬며 돌아온 침대에 베개 닢 식은땀만 축축이 젖어 든 ‘가정의 달’ 잔인한 꿈속의 몽상(夢想)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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