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전방에 서 있는 ‘몸짓 예술’의 기수
최전방에 서 있는 ‘몸짓 예술’의 기수
  • 류환
  • 승인 2020.05.25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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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체 예술로서의 퍼포머니즘

[뉴스봄 =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창작예술 행위, 무대를 거부하다

행위예술은(퍼포먼스) 다다니즘(dadaism)에서 출발한 아방가르드(abnt_gard)예술의 한 형식이다. 전통예술이 가지고 있는 고정화, 관념화, 제도화에 반발, 대항하는 실험적인 몸짓 표현에서 비롯된 행위적인 무기로 진화해왔다.

이런 의미에서 행위예술은 항상 최전방에서 반항적이고 혁명적인 사고를 지향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나라에 처음 상륙한 60년대 이래 퍼포먼스는 매우 의식적인 방향으로 전개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양한 예술가들이 보여주었던 초혼(招魂)이나 의례(儀禮)와 같은 행위들은 현대인들의 기대심리 또는 전통의 샤머니즘과의 연결고리에서 조망하고 진행돼 일편으로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었던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퍼포먼스는 어디까지나 시작부터 하나의 창작예술 행위이며 예술의 무대는 바로 그 예술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신체를 보여주는 곳이 현장이고 발표의 장으로 무대가 됨에도 불구하고 안일하게 치부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퍼포먼스창작의 본질이 인간의 본질과 상통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퍼포먼스예술에 있어 표현의 그 자체가 본령이고 인간(예술가)은 표현의 그 주체자로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체를 통한 메시지의 전달은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제한적일 수 밖에 없는 부분도 분명하다. 왜냐하면 메시지라는 비가시적, 비현실적인 차원을 신체라는 가시적, 실체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다가 사라진다고 해석하기에 그렇다.

최근 총체적인 면에서 다양하게 불리는 퍼포먼스는 사실 위에서 밝혔듯 행위예술에서부터 출발, 시초가 돼 오늘에 이르러 지속되고 있으며 최전방에서 지향하는 행위예술의 일반적인 성격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구분하고 정의할 수 있다.

행위예술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첫째, 행위예술(퍼포먼스)은 억압적인 사회규제나 정치상황에 대한 기존 행위들을 반동적으로 반항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 메시지의 직접적인 전달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행위예술이라는 형식의 틀 속에서 재해석한 방법론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전달하려는 메시지의 강도(强度)가 약화되거나 무기력에 빠질 우려가 있다.

또 이런 경우에는 창작의 자유가 완전하게 보장되지 못할 때 메시지 자체의 변형이 생길 수밖에 없으며 작품의 내용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둘째, 행위예술(퍼포먼스)은 신체와 오브제 등을 사용해 창작하는 예술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단순 이벤트의 성격처럼 가볍게 보는 경향이다.

이럴 경우에는 원래의 목적에 부합하는 신체적이고 순수한 창작예술의 하나인 행위예술을 자칫 일회적인 시위의 성격이나 돌발적인 행위정도로 치부해버려 예술자체의 본질을 흐릴 위험성이 뒤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본질의 창작예술을 망각한 사회집단이나 종교단체, 심지어 정치색을 띤 많은 단체에서도 행위예술을 자신들의 의사표명의 수단으로 악용하는 사례도 필자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체감하고 있어 지적된다.

물론 표현의 자유는 자신들이 결정하고 진행하지만 어디까지나 행위예술은 예술가의 창작에 의해 관람자들에게 계도나 계몽 혹은 발표, 알림, 징후 등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예술적 표현방법의 하나인 창작예술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예술가로서의 심미적 표현형식이 뒤따라야 함은 당연하다.

셋째, 행위예술(퍼포먼스)을 일종의 의식(儀式)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 경우는 지적한 대로 무기력해진 현대인들의 기대심리나 군중 속에 함몰돼 일부 사람들의 시각을 단순히 충족시킬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자칫 예술형식 자체의 본질을 변질하고 왜곡시킬 성향이 크다.

현대문명의 급진적인 발전으로 상대적으로 나약해진 현대인들의 정신세계에 호소하듯 단발성 축제나 의식행위 정도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작품의 일정부분만 형식적으로 선뵈는 것으로 관람자들에게 자칫 정신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행위로만 제공될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들은 일시적으로 예술가 자신의 나태한 실연능력으로 비쳐질 수도 있어 경계에 주의해야 하며 가급적 행위예술가들은 작품을 발표하기 전에 충분한 고민과 냉철한 판단이 앞서야 한다.

또한 작품을 발표할 시 행위예술가가 주의해야 할 점은 작품성과 더불어 다양해야 하고 명료해야 관람자의 시선이 고정된다는 점이다.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진화하고 있는 행위예술의 정의?

어느 행위예술가는 모든 행위예술을 매번 격동과 기승전결 없이 동일한 동작으로만 실연하는 경우가 많아 지루하게 느껴지며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불확실하고 난해하게 이끌어 결국 무모하게 끝나버리는 사례도 적지 않아 숙고해야 한다.

따라서 행위예술가들이 모든 메시지를 동일한 방법과 행위로 끝내는 것이야 말로 행위예술가의 미적 예술인 상상력을 스스로 닫아버리는 폐쇄적인 행위이자 매우 안일한 창작태도라 할 수 있어 차별성을 찾는데 작가 자신이 꾸준히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관람자들이 행위예술가의 작품표현 방식을 해석하는데 통상적으로 감동의 수준이 다소 미흡하다거나 월등하다고 볼 때 이러한 획일적인 창작태도는 작가 자신에게나 이를 지켜보는 관람자들로 하여금 안일하게 무엇도 도움이 안 되며 오히려 행위예술을 넌센스 정도의 작품으로 저해하는 요소가 될 뿐이라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바꿔 말하면 화가가 동일한 회화작품을 다른 곳의 전시공간에 여러 번 출품해 전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장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른 행위예술이 퍼포먼스 예술과 행위예술의 본질적 차이점이 있음에도 총칭적으로 퍼포먼스라고 불리며 해석돼 혼돈을 주고 있어 정확한 개념의 용어가 요구되고 있는 시점이다.

자신의 신체를 무기(畵面)로 행해져 온 행위예술을 일부에서는 우리나라의 경우 60년대 후반의 해프닝, 70년대의 이벤트, 80년대의 행위예술이나 신체예술로 불러져 왔다.

이어 90년대와 2000년도부터 퍼포먼스로 불리기까지 유사한 개념들의 다양한 표현들로 현재의 표현어법들이 수시로 변해가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퍼포먼스의 적절한 번역용어들은 애매성을 띠고 있어 국내외 수많은 경험을 한 필자도 아직까지 이렇다 할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행위예술들을 펼치고 있는 행위예술 작가들 몇몇은 실험적이고 도발적인 실험정신을 되찾기 위한 모습들도 일부에서 거론되고 있는 것 또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또 ‘실험예술’이라고 명명하고 예술제를 개최하는 행위예술가들의 소수 의견도 개진되고 있어 한편으로는 퍼포먼스라 불리는 행위예술이 선진국처럼 다양성을 견지하기 시작했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어 조금 더 확대되기까지는 심사숙고해볼 일이다.

관람객과 의사소통은 물론 메시지 전달 필수적

또 하나는 퍼포먼스 예술가의 출신들이 다양하게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쟁의 처참한 비극의 참사와 인간심리를 억압하는 불평등이 부른 분노가 폭발하면서 이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으로 1916년 출발한 다다니즘(dadaism)이후 국제적인 행위예술은 예술가들(특히 미술인)의 기수로 급진하는 영역으로 인식되고 성행해 왔었다.

반면 현재에는 미술인뿐만 아니라 연극, 무용, 음악, 문학 심지어는 마술, 연예인들에 이르러 모든 장르의 전역에 그 영역이 그야말로 천태만상을 이루고 있어 고무적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지양이라 해야 할지 아무튼 폭넓게 활용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되며 동시에 우려도 앞서 호불호를 따지기가 쉽지 않다.

퍼포먼스 예술의 특성들(과정성, 참여성, 즉흥성, 우연성, 전위성, 현장성, 기록성, 신체성, 실연성, 음악성, 다양성)이 그 폭과 깊이에 있어서 총체예술을 지향하는 실연공연으로서 결코 가벼이 여길 일이 아니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

이는 예술의 특성상 예술가 혼자만이 제시하거나 해결되는 과정도 아니며 그림처럼, 문학처럼 단독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어서 간단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상위에서 밝혔듯 예술성으로 참여하는 관람객들과의 의사소통과 메시지 전달이 우선 필수적인 것으로 설정돼야 하기때문에 쉽지가 않다.

따라서 행위예술의 특성상 과거에서부터 근대로 넘어오면서 종래의 예술작품의 특권화가 사라지게 됐음은 물론이고 예술가와 관람자 사이의 이분법칙 관계가 회석돼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70년대 독재정권이 이러한 행위예술의 발전을 억제해 왔음은 이미 금지됐던 대중가요가 대표적인 것처럼 주시된 사실이었으나 8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자유화의 요구로 개방화에 따른 거센 물결이 퍼포먼스 예술의 풍토와 기틀을 잡는데 다소 여유롭게 만든 것도 기실 인정된다.

이는 중앙이나 지방자치단체들이 문화예술 행사에 눈을 돌리며 이를 다소 수용하면서 그나마 퍼포먼스 예술발전이 가속화되는 데 도움이 된 점도 부정할 수 없는 한편, 일부의 이벤트 회사나 기획자들이 퍼포먼스 예술을 자신들의 프로젝트의 일부로 치부함으로써 예술자체의 독립성과 가치를 저해하는 폐단도 낳고 있다는 점도 분명하다.

퍼포먼스 예술의 정체성 확보와 확산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대학교육에서 퍼포먼스 예술을 체계적으로 강의하지 않는 점도 날로 비대해지는 공연문화에서 볼 때 미진한 문제 중 하나로 들 수 있다.

커리큘럼 상으로 퍼포먼스(공연예술) 예술이라는 과목의 시간수를 다른 과목들과 대등하게 정할 수 없는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겠으나 국내외를 막론하고 자기표현의 방법들이 날로 수준 높은 공연을 요구하는 현실에 맞춰 비교해본다면 퍼포먼스 예술의 전담하는 학과도 예견해 봄직하다.

물론 퍼포먼스 예술의 원초적인 형태에서는 연극이나 무용과 마찬가지로 제의적인 성격을 다분히 들어낼 수 있다.

최근에는 무대와 관람객들이 서로 하나 돼 호흡을 맞추며 관람자가 무대에 집적 참석해 대사를 하거나 춤과 노래를 부르는 등의 이머시부(Immersive)가 한참 성행하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성격의 예술형식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정의와 방법이 변해왔음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어느 시대나 특정 예술형식에 대한 정의와 논리는 그 시대의 사회현상이나 시대정신을 반영해 나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활화산이 용암처럼 분출하기 시작한 퍼포먼스 예술이 우리나라에 도입되면서 우리의 전통적인 예술형식 아니 그것을 지배하는 전통적인 정신성과 괴리감이 오랫동안 퍼포먼스 예술의 진정한 현대화로 진입하는데 발목을 잡지는 않았는지 의구심도 배제하기 어렵다.

하나의 형식이 정착될 때 또 다른 반동이 이미 움터

그렇다면 작금의 우리 현실은 어떠한 시대정신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케이 팝이 한류를 타고 우리의 유행을 세상이 따라가고 있는 세태이지만 서구문화 사회가 일상처럼 행해져 가는 현상계를 체감하고 실감한다면 퍼포먼스의 공연문화는 확실하고 명쾌해 진다.

현대사회는 그야말로 표현의 시대이다. 인간들은 사회 나아가 세상을 향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또 그 사회로부터 다양한 정보를 얻는다. 그런가 하면 국제사회나 지구 전체의 문제로 자신의 관심사들을 예술로 승화시켜 확대하고 표현하기도 한다.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은 크게 보면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종교전쟁이 부른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내다보이며 두 종교를 신봉하는 민족 간의 인종전이기도 하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지난 60년대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 시 이를 반대하는 반전(反戰)의 퍼포먼스 예술은 어김없이 그 성과를 거뒀으며 특히 서부지역 대학교 캠퍼스 도처마다 예외 없이 대대적으로 반대시위 퍼포먼스가 실연됐지만 그 전쟁에 동참했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던 사실을 인정하는가?

70년대에 머리가 길면 의식이 퇴폐된다는 미명아래 장발족을 쫒아 다니면서 인권과 자유를 억압한 채 강제로 삭발하거나 여자들의 미니스커트 길이를 자로 재가며 호루라기를 불어대던 해프닝도 벌어졌던 것이 지난 우리 사회의 단면적인 모습이 아닌가.

이러한 독재정권 속에서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열망을 핏빛으로 물들인 사회 환경(정치세력)은 급기야 5·18 광주항쟁으로까지 급진돼 지금까지 아물지 않은 광주항쟁으로 남겨진 채 깊은 상처를 주며 치유되지 않고 있어 씁쓸하고 부끄러운 역사의 굴곡을 남기고 말았다.

사실 지난 광주항쟁의 연유는 정치적인 독재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강제적으로 억제돼 쌓여있던 인간의 표현욕구가 정치적인 성향으로 분출된 셈이라고 봐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역사를 바로 세우고 ‘모순의 시대’에서 ‘조화의 시대’로 나아가야 함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현상은 분명하나 한편으로는 이를 억제하고 가벼이 여기고 있는 사회적인 요인들도 분명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과정들 속에서 행위예술가들의 사회참여 속에 주제표현으로 다양화에 박차를 가해지던 때도 적지 않았다. 민주화가 정착되던 80년대가 그렇다.

인류 역사를 조망할 때 어김없이 나타나는 시대조류의 현상 중 하나가 예술가들의 주제 표현이 핵심이다. 이는 미술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범사회적인 현상으로 확산돼 오늘에 이르기까지 예술가들이 앞장서서 문제를 제기했던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굳이 이유를 든다면 예술가들이 거론할 수 있는 문제가 ‘부정의 미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종종 거대한 문제로 비약하며 좀 더 철저한 논리를 요구하지만 ‘반 생명’, ‘반 자연’, ‘비정치’ 등과 같은 인간의 생명이나, 자연의 파괴, 비도덕적인 정치에 경종으로서 ‘부정의 미학’을 들을 수 있고 이는 곳 현대문명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부정들이 헤겔의 변증법에서처럼 하나의 반제로 정리될 때에는 그것은 사실상 패턴화, 양식화가 될 수 있어 다시 부정의 대상으로 가는 악순환의 고리 속에 빠질 우려가 있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이나 물질들이 모두 변화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차라리 우려할 만한 사안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이 초기 개념화의 상태이기 이전에 생소하고 새로운 것일지라도 일정기간의 무관심이라는 시간의 시험을 거쳐야만 하기 때문이며 하나의 형식이 정착될 때에는 또 다른 반동이 이미 움트고 있다는 역사적인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패턴화된 예술형식, 도전과 실험정신으로 본질 회복해야…

60년도에 도입된 우리나라의 행위예술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술, 음악, 연극, 무용, 문학, 무속, 연예,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한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런 발전양상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인식은 선진국에 비해 아직도 활짝 열려있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돌이켜 보면 보수성이 강한 우리나라의 사회구조 속에서 행위예술이 ‘부정의 미학’, ‘반발의 미학’, ‘파괴의 미학’으로만 치부한다면 ‘부정의 부정’이라는 논리로 비쳐지는 관점들을 제고한다면 이 또한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현대사회가 복잡해지고 다변해져 감에 따라 현대인들의 표현욕구는 더욱 다양하면서도 새로움만을 요구하고 어떤 경우에는 심각할 정도로 강렬해지고 있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예술가들의 패턴화된 예술형식은 그 본질에 있어서 도전과 실험정신을 다시 회복해야만 한다.

‘실험’한다는 용어 자체가 의미하는 것은 ‘새로움’을 창작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것은 이전엔 없거나 낡아버린 것을 새롭게 바꾸는 것이다.

진화적인 미술형식을 ‘아방가르드’적이라 칭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개혁적이고 혁명적인 미술형식을 ‘아방가르드’적이라고 칭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근대화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우리 사회에 도입된 서구의 행위예술이 이제는 현대화되고 선진화된 사회 속으로 그 생명력을 유지해가며 영위해가고 있다.

그렇다면 6, 7, 8, 90년대 등 과거 시기의 시각으로 사회를 조망하며 다변화를 추구하는 만큼 시대적 흐름에 이를 배가시켜야만 공연예술의 발전이 척도 있다.

따라서 2000년대를 거치며 실험정신을 극대화시키고 자주성을 확보하려는 경향이나 몸부림이 곳곳에서 퍼포먼스 예술가들 사이에 나타나고 있음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진다.

행위예술,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을 말하다

지금까지의 글은 행위예술이 도입되면서 거쳐 온 과장들을 나열했다면 21세기가 지난 오늘날 미술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세기말적 현상에서 탈피해 진일보 거듭 새로운 문화의 패러다임을 형성해 나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퍼포머들이 행하는 다양한 퍼포먼스들이 차츰 정착돼 각자의 독특한 표현영역의 구축과 아울러 개념정립도 시급히 아방가르드 정신 속에서 배양되고 이뤄져야 할 문제 중 하나이다.

알다시피 거듭 강조하지만 아방가르드 그것은 현실 안주를 부정하는 것이고 새로움의 가치를 생산하는 창작예술 과정으로 고정된 틀에 박힌 기존질서에 반항하는 몸짓이다.

돌이켜 보면 지난 과거 역동의 시기마다 그러한 몸짓들은 사회를 부정하는 반항아로 치부해버리는 사례들도 흔했지만 오히려 그 반항적인 몸짓의 존재로 말미암아 당시 사회는 더 이상 타락하지 않고 부패하지 않도록 저항하던 사건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수하다.

퍼포먼스 예술이 현실에 대한 부정의 미학이든 아니면 의식적, 축제적, 성격의 공연이든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을 어떻게 말하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그 해답은 과거나 현재의 시각뿐만이 아니라 미래도 함께 아우르는 총체의 예술로서 4차원적인 혜안을 찾는 일이며 한 발 더 가까이 선진문화로 가는 키워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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