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충남의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을 기리며
11월 충남의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을 기리며
  • 육군영 기자
  • 승인 2019.10.31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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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운동가에서 독립운동가, 청산리대첩의 영웅이 되기까지
자주독립을 향한 의지와 민족을 향한 호국정신 돋보여
김좌진 장군
김좌진 장군.

[대전=뉴스봄] 육군영 기자 = 대전지방보훈청은 11월 대전ㆍ충남지역 독립운동가로 김좌진 장군(1889년 11월24일 ~ 1930년 1월24일)을 선정하고 그의 업적과 생애를 알리기위해 노력하고 있다.

청산리 대첩 100주년을 앞두고 김좌진 장군의 생애와 그의 호국정신을 돌아본다.

백야(白冶) 김좌진 장군은 1889년 음력 11월 24일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김형규(金衡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3세 되던 해 부친상을 당해 편모슬하에서 성장했다.

장군은 1905년 대한제국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홍성으로 귀향해 호명학교를 설립하고 기호흥학회와 오성학교, 청년학우회 등을 거치며 계몽운동가로 활동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되자 장군은 이창양행(怡昌洋行)이라는 위장상점을 차려 항일운동의 근거지로 삼는 한편 신의주에 염직회사를 차려 해외와의 연락거점으로 삼는 등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모집을 시작했다.
 
그러나 1911년 장군은 일제에 의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2년간 고초를 겪고 출소 후 다시 홍성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홍성헌병대에서 10개월간 수감되기도 했다.

이후 장군은 1919년 3월 중순 이후 길림군정서를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준비한다. 같은해 10월 대한군정서로 명칭을 변경한 독립군은 정예병의 양성에 주력했다.

1920년 10월21일부터 26일까지 김좌진 장군이 지휘하는 대한군정서는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10배가 넘는 병력의 일본군을 패퇴시키고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공훈전자사료관에 남아있는 자료에 따르면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원인은 사관연성소 졸업생을 중심으로 조직된 부대였고 긴 시간에 걸쳐 충분한 무장을 갖춘 정예부대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궁극적으로 장군은 국내로 진격해 독립을 성취하고자 했으나 1930년 1월24일 중동선 산시역 부근에 금성정미소에서 흉탄을 맞고 순국했다.

한편 충남 홍성군에 있는 김좌진 장군기념관은 11월 대전 충남지역의 현충 시설로 선정됐다.

1989년 김좌진 장군 탄신 100주년을 계기로 지어진 기념관에는 장군의 생애와 청산리대첩의 재현 모형 등 독립활동 관련 자료가 전시돼 있다.

기념관 뒤에는 백야공원과 사당이 있으며 백야공원에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67호 김좌진장군의 추념비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래는 공훈전자사료관에 기록된 청산리 대첩 당시 북로군정서 교관이었던 이범석(李範奭)의 구전으로 남아있는 김좌진 장군의 시다.

[출처]공훈전자사료관, 대전지방보훈청 제공
김좌진 장군 기념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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