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자아의 몰아(沒我)에 응축된 선비시인의 격조(格調)
[평론] 자아의 몰아(沒我)에 응축된 선비시인의 격조(格調)
  • 류환
  • 승인 2020.05.18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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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우봉(又峰) 임강빈 시인의 시론 (전편)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1. 참된 교육자로 시인으로 나아가 호칭 앞에 참된 선비라는 애호(愛好)를 올려 받는 문인으로서 생전에 문학의 이정표를 손짓한바 필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고(故) 우봉(又峰) 임강빈 선생의 삶, 그 끄트머리를 돌아본다.

평소 진리는 옮음을 일러주고 곧음을 실천해 세상과 연결하거나 예술과 연관된 아름다운 선을 잇는 목적지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평생을 시학에만 전념해 역량을 결집시켜온 원로시인이 맺는 인생의 종점에서 터득되는 문학의 숨결에 스민 지혜는 과연 무엇이었는지? 생각에 젖는다.

일상은 과거로 이어지는 역사보다 비교적 오늘이 무거워서 단아하고 단조한 자신의 시학의 툇마루에서 세상살이를 응시하다 머나먼 하늘나라로 소천하기까지 초연하고 정제된 지조와 예술의 정주(定住)에 습득된 문학적 삶의 터에 자리를 잡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간결하게 어우러진 고랑들이야말로 꽃잠에서 깨어난 나비 한 마리가 너울너울 날개짓 하며 꽃잎처럼 다가와 지상에 시심을 뿌려놓는다.

시심이 발아된 씨앗들은 열매가 되고 나무는 버팀목이 되어 후학들과 문인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주며 커다란 거목으로 이 시대의 보기드믄 마지막 선비시인이라는 문학적 가치를 거둬 땅심을 길러야 문학예술의 정원에 꽃이 핀다는 이유를 상기하며 들어가기에 앞서 필자의 글은 기사체로 구사해 기록한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

또한 대체로 첫 서두에 논하고자 하는 그분의 연보와 업적 그리고 시편들을 우선 살펴보는 것이 순서처럼 내용들을 전개하고 있으나 필자는 형식과 방법을 달리해 선례에 얽매이지 않고 표현의 자유로움을 취하고자하며 예술적 감동을 이루는 요소들의 관계를 분석해보고 작품의 실체적 본질을 지키는데 초점을 맞추고자 하나 훌륭한 선생의 작품들을 논하자니 어려움도 뒤따른다.

따라서 필자는 선생이 소천하기 바로 직전인 2016년도에 발간한 마지막 시집인 제13집 ‘바람, 만지작거리다’를 중심으로 글을 전개하고자 하며 우선 제목에서부터 선생의 예술 속에 녹아든 심상(心想)의 세계를 내다보고자 한다.

2. 왜 ’바람, 만지작거리다‘ 인가? 물론 ’바람 송(頌)‘이란 주제는 시집에 게재했지만 목차의 시(詩)편에 싣지 않은 상위의 제목을 마지막 시집의 주제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주지하다시피 ‘바람’은 무기체여서 만질 수도 만져지지도 않는다. 주목하건데 바람은 대타의 공간이 갖는 타자의 입체적인 공간을 설정해 공간에서 흔들림으로 이어지는 부딪침과 움직이는 대상의 표정들을 선택하고 이를 주시했을 것으로 해석되며 한편으로 무한한 공간을 규정하는 자연적 의식에서 자신의 시선과 마주하게 된다.

여기서 그 흔들림이란 4차적인 프리즘을 연상하고 바람 속에 자신이 중심이 돼 현상 속의 존재나 실존의 이유를 형성하고자 했을 것으로 풀이 된다.

이는 현실 속에서 아직 살아 움직이는 1차적인 자신과 다양한 사물들을 반추시켜 동질성의 회복을 이끌어 내는데 ‘바람’ 이란 단어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다시 말하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자신의 존재에 유효한 의미로 또 하나의 가상적 시선을 형성하고 대응해 나아가고자 한다.

주목되어지는 것은 존재의 확인과 생명을 병치시키려는 의도가 저변에 숨어있다는 것도 직시하게 되며 내면에 비춰지던 거울이 다시 자연으로 환치돼 주변의 환경과 자신을 동시에 비추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시 ‘바람 송’을 읽어본다.

바람은 자리가 따로 없습니다.

궁둥이를 붙일 틈을 주지 않습니다.

꽃 이파리가 흔들릴 때

나뭇가지가 흔들릴 때

깃발이 펄럭일 때

바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람은 언제나 바쁩니다.

한곳에 머물지 않고

변화무쌍합니다.

그 힘이 바람입니다.

바람은 소리가 있습니다.

살아있는 증표입니다

― ‘바람 송頌’- 전문

이 작품에서 보듯 선생은 바람을 부르며 기다리고 있다. 직관과 성찰의 과정을 거치면서 바람을 기다리고 바라보는 시선을 탐닉했을 것이다.

사실 바람은 머무는 것 같지만 머물지 않고 머물지 않는 것 같지만 머무르는 공간성이 갖는 원형질로부터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흔들리는 바람의 자유로움과 그 소리로부터 시의 근원을 찾고자 한다.

선생의 시선이 머문 곳, 이를테면 자연 속에서 또는 거리에서, 골목에서, 집안의 창가에서, 차창에서 바람이 스치는 대상들이 움직이고 흔들려야 비로써 살아있는 바람을 만날 수 있다고 직시하고 있으며 사물들의 몸짓과 속삭임들이 자신에게 교감되고 있을 때 하나의 모티브가 된다는 것을 피력한다.

살갗을 애이며 옷깃을 파고들어 가슴에 절로 스며드는 느낌과 흔들리는 사물들에서 교감이 이루어지는 순간 상상의 꿈속의 빛살들로 살아나 행간을 채워나가는 일상의 또 다른 의미로서 움직이는 존재를 찾아간다.

만질 수 없는 ‘바람 만지작거린다’라는 단어에서도 예감할 수 있듯 선생은 만짐을 빌려 지난 과거를 회상하며 손의 가벼움과 자연스런 움직임으로 기억 저편에서 끌어오는 시간을 만지고, 세월을 어우르고, 추억을 보듬었을 것으로 미뤄지는 바,

허허로운 일상들이 보내는 신호들 속에서 자신을 찾아내는 것으로 생전의 잔잔했을 물결에서 투영되고 반사되는 지나가버린 과거 속에서 기억들을 모색한 부분이 구분되며 상상의 반복에서 소환된 관념의 위기를 예술적 직감으로 극복해 나가고 있는 견고한 상황을 드러낸다.

또 ‘만지다, 만져보다, 만져지다’도 차용할 수 있었을 터인데 ‘만지작거리다’를 수용한 이유도 다소 가벼이 여길 수 있는 ‘자작거리다’의 소소함과 바람이 주는 형상의 의미를 상기시켜 볼 때 청각의 시각화로서 동시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만지작거리다’와 ‘바람’이란 현상이 자연과 일치감을 갖는다는 것에 접점을 찾아 효율성을 한층 가미시킨다.

선생은 이를 무리수가 없다고 판단한 이면은 손에 쥐면 쥘수록 사라지고 없어지는 빈손에서 공허함만이 확인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문학적 시너지만 연소돼 소진될 뿐이라는 것을 두터운 생의 경륜에서 경험한다.

따라서 일상에서 체득한 가벼움만이 비워지고 자신이 갖는 자연에 대한 몰아의 해석과 동의된다는 판단과 논리로 ‘내가 가벼워야 세상이 가볍다’는 이해로 문학적 표현을 구사해 ‘자작’이란 단어에 수를 놓는다.

3. 다음은 시집의 컷 표지에서 필자는 선생의 무의식적 의식을 다시 주목한다. 시집 출간을 앞두고 마지막 시집이 될 표지를 놓고 고민했을 것으로 보인다.

후일담으로 건네 들은 이야기이지만 미술을 전공한 어느 미술교사한테 표지를 의뢰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안았던 것 같다. 그래서 표지의 작품을 직적 그렸다는 것이다.

그동안 많은 시집을 발간했지만 죽음을 예감한 원로시인이 영면 직전에 굵은 초록컬러로 짙게 눌러 그린 네 그루의 나무 같기도 하고 들풀 같기도 한 작품을 완성한 것은 사물에 대한 또 다른 중요한 미학적 접근이며 성취이다.

시집 첫 글 ‘시인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 ‘마지막 시집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 선생은 표지를 앞에 놓고 마음속으로 무엇을 그려 넣어야 하나 고민하게 되고 이런저런 여러 생각들이 교차했을 것으로 예상되며 이는 그동안 출간했던 많은 시집 중에서도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부탁한 작품이 마음에 들었으면 다행이라 여겼겠지만 석연치 안았던지 작정하고 마지막 시집의 장식은 본인이 직접 그려 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손수 떨리는 손으로 갈무리했을 것이다.

86세의 고령인 자신이 손수 그린 그림으로 완성했다는 결심도 중요하지만 고백하듯 그림 속에 투영된 간결하지만 생명력을 지닌 풍성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비록 간단한 컬러스케치로 제작했다고 하지만 잠깐 동안일지라도 화필을 잡은 것은 분명하다. 이는 선생의 또 다른 내면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시(詩)는 색이 없는 그림(畵)이고, 그림(畵)은 말 없는 시(詩)라고 하는 흔한 이야기에서도 재차 발견하듯 굳이 설명이 필요 없어 보인다. 또한 한자문화권에서 과거 선비들 하면 3대 예술장르라 할 수 있는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시(詩), 서(書), 화(畵)의 삼절(三絶)이 우선 떠오른다.

이는 인문학적 지층이 두터워야 함은 물론이고 응축된 학문적 바탕이 깊어야만 가능해 테크닉만으로 대가의 반열에 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시조를 읊으면 글을 쓰기 마련이고 비어있는 여백에 한 폭의 그림을 그려 넣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며 선비의 기품을 찾는다.

시, 서, 화 삼절 가운데에서 시는 읽는 예술이라고 한다면 그림은 보는 예술의 측면이 강하고 글씨는 양쪽을 겸비하고 지탱해 일종의 종합적인 조형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의 작품은 비교적 단순해 보이는 그림이지만 주목컨대 미술에서 구도와 구성도 중요한 요소가 되지만 대상의 표현기법과 전달하고자 하는 이미지의 메시지가 핵심이 된다.

따라서 컷 표지에 얹힌 그림은 군더더기 없는 한 폭의 작품으로 인식돼 시선과 상상이 머문다.

그림에서 보듯 나무 혹은 키가 큰 들풀 네 그루가 여유롭게 풍성한 초록 잎을 달고 바람에 흔들리듯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바람으로 느껴지는 가느다란 실선 위에 걸려있는 생명들이 이채롭다.

심리적으로 내다봐도 안정감이 주는 넉넉함과 깨끗함이 간결하게 표현돼 편안함을 유지시켜 주고 있어 예지적인 안목이 충만해 보인다.

모든 예술은 기본에 충실하면 기교에서 놀고 기교에서 무르익으면 다시 기본으로 돌아와 함축된다는 점에서 선생의 이면을 분석하는데 충분한 작품으로 그 이유가 된다.

다만 한편으로 자세히 보면 아쉬운 점도 보인다. 이는 작자의 의도적인 방법일 수도 있으나 마지막 끝자락에 서 있는 나무, 그 가지 위에 잎이 하나가 떨어지고 비어있다. 이는 조형적인 표현으로 선생이 생략한 표현의 방법일 수도 있다고 짐작된다.

제일 작아 보이는 한 그루의 나무에 떨어져 텅 비어있는 조금은 쓸쓸한 풍경, 바로 자신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며 세 그루의 건강하고 튼튼해 보이는 나무와 위로 솟아있는 많은 잎들은 가족, 이를테면 손자들과 손녀 그리고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그 식구들일 수 있지만 끝자락에 작고 초라한 듯 보이는 한 그루의 나무는 자신을 형상화 한 것으로 유추된다.

예컨대 여기서 눈여겨 관찰해보면 구체적이라고 생각돼져 애착했던 어떤 상(象)들을 스스로 설정하고 의식의 심층부에 머물러 있던 모티브들을 확장해 형상화된 개념을 통해 드러난 것이 형(形)의 차원에서 획득돼지는 이미지로 자신을 위로하려 사력을 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맨 위에 붙어 있어야 할 잎이 떨어져 비어있고 세 잎만이 달려있는 것 또한 아마도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삼남매를 연상해 구체화한 장녀, 장남, 차남을 비유했을 가능성이 커 보이며 이미 떨어져 가는 자신의 존재감을 그림으로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이는 머나먼 귀로를 예감한 자신과 아내가 떠나가야 하는 길을 미리 배웅하는 묘사로 직시되고 있다는 관점에서 암시가 가능하며 이 부분에서도 선생의 간결한 마음을 느끼게 된다. ‘그림의 어원은 그리워하다’라는 말이 여기에 적절하다.

앞서 밝힌 바 있듯 몇 그루의 나무와 같은 자연 내지 식물을 차용하는 것도 바람이라는 무기체와 함께 하나의 동질감으로 완성돼 맥을 같이한다.

바람이 불어야 흔들리고 흔들려 움직여야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생의 여울에서 펼쳐졌을 가장 큰 확신으로 바람을 선택해야 마지막까지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는다.

여기까지 선생의 마지막 시집 ‘바람, 만지작거리다’를 놓고 본문에 앞서 제목과 컷 표지의 그림에서 읽히는 몇 가지를 간단하게나마 필자의 시선에서 조망해 봤다.

4. 시집을 펼쳐놓고 정독하려 하니 우선 저만치 선생과의 오래된 인연들이 잔잔한 물결 위에 조약돌을 던진 파장마냥 밀려오며 1990년대 중반이 떠오른다.

선생은 필자와 학교에서 맺은 인연은 아니지만 문인협회와 문학의 뜰에서 몇 번의 특별한 인연이 맺어진 일들을 체험하고 경험했기에 매우 뜻 깊게 여겨 오래도록 가슴속에 묻어두고 있으며 문단의 많은 문인들과 후학들은 선생을 존경하고 우러르는 표상적인 시인으로 여겨져 왔다.

특히 필자와 나누던 대화에선 당시만 해도 지역에서는 퍼포먼스(porfermance)로 불리는 행위예술(行爲藝術)이나, 전위예술(前爲藝術)이라는 말조차 난해해 어려워하는 이들이 많았으며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지향하는 것을 탐탁해 하지 않는 이들도 드물게 있었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오래전부터 형식을 파괴하는 용어로 공연예술에서는 이머시브(lmmersive)가 유행돼 무대와 객석의 구분을 두지 않고 하나로 섞여가는 것은 물론 예술과 예술, 산업과 과학, 경제와 문화, 예술과 과학 등 다양한 예술장르 간 시그널을 통해 경계를 허물며 결합해 대중화되고 일반화된 지 오래됐다.

그러나 당시엔 다소 낮선 아방가르드(avnt-garde)적인 인식을 벌써 선생과 같이하고 있었으며 음악이나 미술에도 해박한 지식과 학식으로 다양한 예술분야를 폭넓게 이해하고 있어 생전에 소통과 교감을 함께 나누던 특별한 감회를 기억하고 있다.

필자가 알기에도 선비는 품성이 선하고 온유하고 지혜로워야 하며 학식이 풍부하고 양보와 이해를 미덕으로 여기고 베풀어 살아가는 마음을 갖춰야 한다.

물론 충절의 고장 출신이란 명맥도 빼놓을 수 없지만 변질하지 못해 약간은 손해를 보더라도 그 근본만큼은 묵직한 가치를 지니고 있을 때 비로써 학자적인 선비라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안으로는 망념을 이겨내는 지혜를 모으고 밖으로는 남을 질투하거나 다투지 않는 미덕을 쌓아야 옳을 것이다.

특히 선비는 그 선비다움으로 본보기가 돼야 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존중과 공경으로 따라나설 때 윤리적인 관계망이 형성돼 토양이 만들어 질 것이고 문학의 뜰에서도 예가 정립돼 사람과 자연을 어우르는 근본의 궤가 일치할 때 비로써 예(禮)와 예(藝)로 대도(大道)를 이룰 것이다.

물론 선생을 선비시인이라 지칭하는 것은 개인적인 시각의 몫으로 두지만 이미 정년 시 발간된 퇴임기념문집 ‘채우기와 비우기’(1996년, 오늘의 문학)에서 각양 각지의 수많은 문인과 예인들이 선생을 우러러 선비라 표현한 다양한 글과 작품에서 이를 입증하고 있다.

성숙한 사회를 위해 어느 곳이든 모범이 돼 존경할 수 있는 참된 어른과 어른스런 사람이 강조되고 있는 작금에 더불어 상생해가며 세상의 이치를 일깨우는 선비정신이 절실하다. 이는 무엇보다 인성이 먼저라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높은 이유이다. <후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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