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시인 고(故) 김관식, 그는 누구였나?(하편)
천재시인 고(故) 김관식, 그는 누구였나?(하편)
  • 류환
  • 승인 2020.07.1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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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적인 기행으로 문단에 남긴 굵고 짧은 단편들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행동으로 표출된 고(故) 김관식 시인의 의식

‘대한민국 시인 김관식’ 이란 무겁도록 느껴지는 위엄적인 세 단어가 나타내는 위용.

상위 단어는 필자가 만들어 필하는 것이 아니라 김관식 시인 자신이 명함에 새겨가지고 다니던 수식어이자 호칭이다.

김관식 시인은 당대의 최고라 일컫는 선배 문인들이나 정치인들에게 조롱이나 야유를 하듯 명함을 들고 다니며 선후배는 물론 누구든 간에 또는 어느 장소 모임이든 가리지 않고 상대의 이름 뒤에 무조건 ‘군(君)’이란 인칭을 붙여 불렀다.

주지하다시피 ‘군(君)’은 친구나 손아랫사람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쓰고 있음은 당연한데 이를 무시하고 불렀던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만이 ‘대한민국 시인’이라는 대표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독선이었을까?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볼 때 얼마나 어이가 없는 일이라 여겼겠으며 시인답지 않게 거들먹거린다고 따뜻한 눈길 한번 받기는커녕 그를 회피하는 사람들도 상당수로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럴만한 자신의 이유가 천재적으로 움튼 시그널이 내재돼 있어 해박한 지식이 연동돼 작용했을 것이 눈여겨진다.

그는 시인 이전에 번역가로서 유럽문학을 우리나라 현대시에 접목시켜 한국문학을 한층 이끌어 올린 지식인으로 구태와 답보상태에 놓여있는 당시 문학과 당대 유명하다는 시인들의 무의식과 매너리즘에 빠진 문단에 경종을 울리고 이를 일깨우려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하고 추론된다.

그의 말을 빌려 옮기자면 “너희들은 우물 안의 개구리같이 깨이지 못한 문학적 인식, 이념, 파벌주의 등 지금도 달라진 것이 하나 없다”라며 일갈하는가 하면 노벨문학상이 발표될 즈음엔 이를 수군거리는 이들에게 “자성과 성찰의 노력도 없이 경박한 어조를 구태를 보이는 것도 여전하다” 라고 호통을 치며 강변한다.

사실 이러한 연유에 앞서 그런 그를 주목할 부분은 김관식 시인의 행동하는 작가정신이 말하고 있는 행동철학은 당시의 문학인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로 이해해야 가능할 것이다.

말로만 예술 중 으뜸이라고 문학 운운하며 추켜세우지 말고 글을 쓰고 다듬는 지성인들이라면 뼈를 깎는 고통이 수반되더라도 바늘로 거울을 닦는 심정으로 성찰과 반성으로 진정한 작가정신을 함양해야 한다고 이르고 있다.

이를테면 사회구조적 모순과 매몰에 함몰되지 말고 얕은 인식에서 털고 일어나 시류에 영합하거나 유명시인들의 파벌주의, 자신의 말만이 진리인 것처럼 아집과 독설로 점철돼 가는 현실들을 직시한 언행들이다.

진보의 한계, 실험정신의 부재, 의식 없는 하극상의 안주 등 사회참여로 대안을 제시할 줄 아는 행동하는 작가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꼬집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천제시인 김관식 시인의 주장대로 사회의 모순적 구조와 작가철학이 상실된 시대라 말하고 있는 그를 통해 당시 한국문학의 정체성을 헤아려보고 진정한 문학정신을 어떻게 문학에 부합시키고 있었는지 시대상을 읽을 수 있어 이를 짚고 넘어가는 부분들은 지면상 이정도만 기록해 둔다.

이러한 도전정신은 천재시인 김관식 시인이나 알베르토 카뮈, 카프카의 작가정신을 통해 행동 철학적 사회참여를 구하고 논하자면 끝이 없어 여기서 일소하며 마지막으로 이어간다.

에필로그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36세 천재의 광기, 그의 궤적을 살피자면 뒤 따라다니는 대주호(大酒豪)로 비사의 일화들은 한둘이 아니어서 그 누구보다도 숱한 파행과 기행으로 점철돼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많은 대가들을 찾아다니며 한학과 동양사상 등을 사사받으며 몸에 익혔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공초 오상순, 미당 서정주, 정연보 등 이들의 영향으로 동양적 명상의 높은 경지를 오르게 되며 무게 있는 작품들을 발표해 문단의 큰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시작(詩作)의 뛰어난 재기와 작품에 앞서 대주호로 부지기수의 술에 관한 이야기들로 일찍부터 면모를 드러낸다.

그가 중학교를 다닐 때 아침부터 술에 취해 학교에 등교하자 선생이 이를 보고 불서 매를 들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분통한 그는 집에 가서 동의보감을 가지고와 선생에게 따지듯 “국화주는 어디에 좋고, 인삼주는 어디에, 칡주는 어디에 좋다기에 나는 술을 마신게 아니라 약을 먹었다”고 항변해 선생에게 항복을 받아 냈다는 일화는 일찍부터 그가 술을 얼마나 좋아하고 즐겼는지를 알 수 있다.

또 성인이 되어서는 “이놈들아! 이놈들아!”하고 술에 취하면 내뱉는 하나의 호칭은 그를 가리키는 일종의 상징인 언성이 돼버렸다.

느릿느릿한 강경 사투리로 “이놈들아! 이놈들아!”하고 뒷짐을 지고 거리를 휘젓고 활보하면서 문단의 선배들을 대할라치면 노대가인 박종화든 김동리든 황순원, 조연현이든 박군, 김군, 황군, 조군 등으로 불러 “내 술값을 대라”고 호통을 치는 경우가 많아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어느 날인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축사를 하고 있는 출판기념회에 술을 거나하게 취해 나타났다.

그는 그 자리에서 “에~또, 자네는 그만하고 내가 말을 좀 해야겠네”하고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마이크를 뺏어 쥐고 정치계에 욕설을 퍼부어 댔다.

그 자리엔 그의 동서이자 선배인 서정주가 의장으로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문인들의 모임에서 김관식은 “의장”하고 횡설수설하는 바람에 중요한회의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일화는 유명하다.

이 같은 김관식의 삶에 형태는 문인사회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직장에서도 그대로 재현됐다.

육당 최남선의 주선으로 서울상고에 국어교사로 들어간 그의 자기 의자 뒤에 하얀 페인트로 ‘세간 생활하되 허공같이 비워서 걸림 없게 하고 연꽃이 더러운 물에 젖지 않도록 하라’라며 ‘마음은 언제 어디서나 장애되거나 구애받지 않으니 자기의 부처에게 의지하라’고 법구경의 구절을 써놓고 자유롭게 유아독존처럼 지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논란은 계속됐다. 학생들을 이끌고 술을 마시고 운동장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개를 잡아 안주 삼아 술을 마시며 사창가를 들락거렸다.

술 냄새가 진동하는 김관식을 교장이 불러 “나는 술 냄새를 좋아합니다. 은단 냄새도 좋아합니다. 그러나 술 냄새와 은단냄새가 섞인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자 김관식은 파안대소하며 “그럼 앞으로는 은단 같은 것은 안 먹겠습니다. 김관식의 대실책입니다”라고 해 교장의 입장을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었던 일화 등 대주가로 주신(酒神)이란 별명까지 얻은 일화와 비사들을 나열하자면 한둘이 아니다.

그는 얼마간의 교직을 마지막으로 학교를 떠나며 4·19 직후에 실시된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시 신파의 우두머리인 ‘장면’과 용산구에서 맞붙게 돼 낙선하게 되면서 그 결과로 부친에게 물려받은 유산인 세검정에 위치한 과수원을 몽땅 날려버리게 된다.

그래서 결국은 낙선과 함께 빈털터리가 돼 그에게 있어 더욱이 술과 시만이 남게 된다. 이런 연유로 앞서 밝혔듯 모든 것을 정리하고 산속으로 칩거하는 이유가 된다.

천재시인 김관식을 문예지에 추천하고 처재를 배필로 삼게 했던 서정주의 술회 한 토막이 눈물겹다.

“몇몇 가까운 심우와 선배들을 쪼금씩만 믿었을 뿐, 아무도 믿으려 않고 욕만 퍼부으며 철저한 자존심과 깡소주로만 살다가 완전히 폐가 녹아 사십도 못 넘기며 쓰러져간 젊은 사내”라고 일컬으며 “천재출신의 김관식을 추천한 것을 나는 한동안 후회했으니 이제 후회도 안 해도 되는가? 또다시 우리를 괴롭게 울리며 죽어갈 염려는 없어졌으니까!”

한탄하며 쓰러져 죽어가는 김관식을 애도하는 말이라 여겨지는 대목이다.

김관식은 한국문학사상에서 가장 많은 자유를 누렸고 관습과 관행을 몸으로 타파하는 지식 있는 시인임엔 틀림없어 보인다.

1934년 충남 논산에서 태아나 강경상고를 졸업한 뒤 서울로 올라와 최남선의 수제자가 되고 미당 서정주의 동서가 됐던 그는 어려서부터 천재로 주변에 이름을 떨쳤고 성년이 되면서 시와 술과 병고와 기이한 행적으로 그야말로 그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세상과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짧은 생을 살아오는 동안 수많은 화제를 남겼다.

그러나 그를 이르는 많은 문인들은 가난과 병마와 싸움에서도 절망적인 상황 속에 처해 있었을망정 언제나 당당하고 늠름한 모습으로 문학과 호기로 세상을 살다간 서른여섯에 요절한 시인이였지만 너무 인간적인 삶을 살다간 흔치 않은 인물로 앞으로 ‘그를 앞서는 천재적인 시인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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