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흰 소가 말해주는 ‘울분과 통한(痛恨)’ (상)
[평론] 흰 소가 말해주는 ‘울분과 통한(痛恨)’ (상)
  • 류환 전문기자
  • 승인 2020.11.30 21: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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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미술사에 큰 획을 남긴 천재 화가’ 이중섭
정직한 화공이 그려냈던 순수한 화풍
그는 왜? 그림 외에 말(言)이 없었나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화가·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화가·행위예술가] 천재적인 화가 ‘이중섭’ 보기에 앞서

천재적인 사람들이 바라보는 무지개의 색은 일곱 가지가 아니며 땅바닥에 뒹구는 낙엽을 보고 허무한 인생의 덧없음을 헛하지 않는다.

인생의 무위(無爲)에서 우주만물인 삼라만상(森羅萬象)에 수(數)를 조응하고 그것을 그리며 자연계의 모든 현상과 원리를 앞당긴다.

피타고라스(기원전 570~495)도 수(數)를 우주의 상주적(常主的) 원질이라 해 이것에서부터 만물의 질서 있는 코스모스(Cosmos)를 형성하는데 괘를 같이한다.

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바다 위에 던져진 하나의 작은 돌과 같이 인생에 (無爲)를 두고 있으며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는 고목 위에 작은 새 한 마리가 부리로 다듬다간 어떤 형상의 조각도 그래서 뭇사람들의 시선을 초월한다.

그들은 인간사와 자연계의 이치와 순리를 뛰어넘어 인간 군상들의 범주에 들지 않으려 하며 자유로운 상상을 염원하고 그들만의 세상을 추구해 외롭고 고독한 길을 자처하게 되는 현실들을 되받아친다.

누구나 정신은 육체를 지배하고 육체는 정신을 지배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가 갖는 동질성이지만 정신도 육체도 통제키 난해한 입장에 처해 있는 천재적인 그들의 공통점은 파행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해 우리 현실을 차라리 진실하게 다가오게 한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과 성질이나 언행이 범상치 않은 사람, 즉 별난 사람들을 가리켜 천재와 더불어 기인(奇人) 또는 괴짜라고들 흔히 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로 표현한다면 방외지인(方外之人)이라고도 한다.

주지하다시피 이 말의 본질은 테두리 밖의 사람, 범위 밖에 있는 사람, 세속의 밖에 있는 사람, 속세의 속된 일을 벗어난 고결한 사람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른 말로도 국외자(局外者)라고도 할 수 있으며 그 뜻은 테두리 밖에 있어서 테두리 안의 일과는 관계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과거를 조명해 볼 때 인류의 역사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정상적인 또는 범상한 인물보다는 기인(奇人)이나 방외자(方外者)들에 의해 발전이 거듭해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기행(奇行)으로 한 시대를 살다간 당대의 기인이나 괴짜 혹은 이단아의 천재적인 예술인으로 짧은 생애의 삶을 살다간 아웃사이더들이 한결 같이 비슷한 삶을 살다가 요절하는 경우가 다반사적인 사실로 그러한 절차를 밟아가게 마련이어서 이를 어떻게 표현해야 정확할지 애매해질 때가 있다.

그중 한 사람이 대향(大鄕) ‘이중섭(李仲燮)’ 화가(1916~1956)다.

담배갑 은박지 그림과 아이들이 발가벗고 손을 잡고 있는 그림, 제주도 서귀포와 일본인 아내를 둔 화가로만 알고 있는 이들이 대다수 일터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천재적인 소양은 말로 다 표현키 어려울 정도다.

전업(專業)으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화(秘話) 속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가며 인생역경(人生逆境)을 드리운 화가로 적지 않은 파격적 파행을 이어가며 예술혼을 불태웠던 화가로 명성이 높다.

그의 족적에 머물던 자유로운 기상과 사물의 본질, 예술적 진솔한 고백과 가난한 몸부림으로 통한의 세월을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점철하며 세상을 꿰뚫어 보던 천재적이었던 눈빛 소유자의 화가.

자유로운 기질의 갖은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했던 외곬적인 성격을 가진 순진무구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이던 예인(藝人).

그래서 실로 옹골찬 개성과 침묵으로 시공(時空)을 뛰어넘어 일상의 고립에 빠져 있는 이 시대, 머뭇거리고 있는 사람들의 깊은 잠을 흔들어 깨우는데 그의 맑은 영혼은 부족함이 없어 현대를 살아가며 무딘 감정으로 서서 있는 우리에게도 적잖은 울림으로 가슴에 저며오는 애잔한 파문들을 건져보고자 한다.

번뜩이던 행동으로 이어간 그의 행동 속 굽이치던 준엄한 정신과 뜨거운 예술 혼을 비춰 세심(洗心)하듯 물을 끼얹어가며 그의 뒷모습을 따라 분석해가며 그의 발걸음을 세밀하게 추적해 본다.

그의 발길에 비취던 궤적

싸우는 소, 흰 소, 소와 아이들, 꽃게, 길 떠나는 가족, 닭과 가족 등 그의 유명한 그림만 보아도 누구의 작품인지, 어떤 상황들이었는지 필명을 안 보아도 이내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세를 탄 은박지의 작품들은 시대적 상황과 자신에 처한 주변 환경을 말해주고 있는 듯 상세하게 드러난다.

작품과 앞서 인간사에서 그는 평소에 말수가 없었던 화가로 친한 이들마저 그의 속마음을 도무지 알 길이 없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만 사람을 대했었다는 것쯤은 관심 있는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우선 그는 진실이 담겨있지 않은 사교적인 말이나 겉치레가 싫어 건성건성 건네는 인사말들을 제일 싫어했으며 적당히 만나고 돌아서는 것도 인사치레 같다해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친구들도 그의 집에서 조차 밤새도록 술을 마시는 날에도 말수가 없었으며 다음날이면 모두 일찌감치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지기 일쑤였다.

이중섭은 1946년 원산사범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한 적이 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뭘 가르쳐야 온당할지 몰라서 얼마 만에 사직서를 냈다고 하니 천재적인 화가로 인정받고 있던 그가 뭘 가르쳐야 할지를 몰라 교사직을 스스로 그만뒀는지 사실 기저에 뜻하는바 여럿으로 음미해 볼만한 대목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항상 ‘가짜’라고 말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인 된 1955년 ‘미도파백화점’(화랑)에서 마지막 개인전을 가졌던 그는 전람회장에서 관람객이 작품을 구입하고자 딱지를 붙이면 “또 한 사람이 속아 넘어갔네”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궁핍하게 지내면서도 자신의 그림을 산 사람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이거 아직 공부가 덜된 것입니다. 앞으로 진짜 작품을 만들어 선생님이 지금 구입하신 그림과 똑같은 그림을 만들어 바꿔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곤 했으나 그 약속은 한 번도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외모도 범속(凡俗)을 초월한 모습을 지녔었다. 해방 직후 이중섭이 원산에서 있었던 시절의 모습은 키가 훌쭉하게 컸으며 얼굴은 갸름하고 창백한 편이었고 코밑수염을 기르고 긴 머리는 모두 뒤로 넘겨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연신 손으로 빗어 넘기곤 했다.

사물에 집착하는 그의 눈은 늘 빛이 나고 있었고 이따금 날이 추우면 작업모자 같은 벙거지를 쓰고 이상하게 만들어진 조끼 같은 것을 몸에 걸치고 다녔으며 손에는 큼직한 담배파이프를 들고 다녔지만 그런 물건들은 모두 손수 만들어 애용하던 물건들이었다.

늘 말수가 적은 그는 단정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 무척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그와 같이 생활을 하지 않고서는 그의 마음을 알 길이 없을 정도로 첫마디만 꺼내놓고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방에게 동의를 구하는 냥 그의 심중은 표정으로 읽어야 하는 이심전심으로 알아차려야 이해할 수 있었다.

또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도 평범하거나 예사롭지 않아 그것을 한참동안 들여다보거나 허공을 바라보며 골똘히 사색에 젖는 날이 많았던 것으로 보아 여럿 이데아나 문학적인 시상들을 그림 못지않게 상상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

짐작컨대 어쩌면 그는 그림으로 포에지(Poesy)를 표현하려 했던지, 아니면 포에지로 그림(繪畫, Painting)을 그렸던지 감지하기엔 둘 중 하나는 틀림없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중섭의 성장과 학교생활

‘이중섭’은 1916년 4월10일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소재에서 부농이었던 부친 ‘이희주(李熙周)’ 사이에 2남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다. 그는 그의 형 ‘이중석(李仲錫)’과 나이 차이가 무려 12살이나 터울이 있어 태어나면서부터 성장할 때까지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성장하게 된다.

이중섭은 이런 성장 배경 속에서 그가 성인이 돼서도 천진난만한 작품을 남기게 되는 성격과 정서가 밑바탕이 됐었던 것으로 추론된다.

그러나 그가 한참 성장하던 5살 때 부친이 별세하게 된다. 하지만 태어난 고장에서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익히다가 8세가 되는 해에 평양에 있는 외가에 보내져 그곳 종로보통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종로보통학교에는 뒷날 문학, 미술 분야의 대가를 이룬 예인들이 많이 다니고 있었으며 동기생으로는 유명한 화가 ‘김병기(金秉騏)’, 소설가 ‘황순원(黃順元)’이 있었고 한 학년 위에는 소설가 ‘김이석(金利錫)’, 두 학년 위로는 시나리오 작가 ‘오영진(吳泳鎭)’ 등이 같은 학교를 다녔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이중섭은 평양 제일의 명문인 평양보고에 응시했으나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고보(五山高保)에 진학하게 된다. 이때부터 이중섭은 그림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그는 오산고보에 입학하자마자 미술부에 들어가 화가의 꿈을 꾸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중섭이 오산고보 시절에 그림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림과 문학뿐만 아니라 스포츠에도 관심이 많아 글쓰기와 권투연습에 열을 올리며 치중했다.

이 무렵 이중섭의 본가에 큰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위에 형 ‘이중석’이 일본의 척식대학(拓殖大學)을 졸업한 뒤 동일은행에 취업해 근무하지만 근무지가 원산에 있는 지점으로 옮겨지게 되자 이중석은 집안의 가산을 정리하고 모친을 원산으로 모시게 된다.

이렇게 되자 이종섭은 원산이 제2고향이 되는 셈으로 형 이중석은 1932년에 동일 은행을 그만둔 뒤 악기점을 개업해 큰돈을 벌어 원산 굴지의 대지주로 성공한다.

처음부터 부농의 집안에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형마저 사업에 성공하게 되자 중섭은 더욱 풍족한 여건 속에서 생활하며 오산고보를 졸업하게 된다.

중섭은 미술에 전념하기 위해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작정하고 유학길에 오른다. 그가 진학한 대학은 동경제국미술학교(東京帝國美術學校)에 입학한 지 한 학년을 마친 겨울방학 때 그는 스케이트를 타다가 다리를 다쳐 1년간을 휴학하고 치료를 받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때의 휴학으로 말미암아 중섭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전기(轉機)를 맞게 된다.

1년간을 쉰 중섭은 동경제국미술학교에 복귀하지 않고 오히려 문화학원 미술학부 서양학과에 신입생으로 입학한다. 동경제국미술학교엔 이미 학년이 바꿔 3학년이 된 동기생들이 있는 터라 그의 자존심은 복학보다 새로운 대학을 선택해 진학한다.

중섭은 여기서부터 그에게 운명의 여인인 일본의 기업가인 딸 ‘야마모토 마사꼬(山本方子, 한국 이름 이남덕)’를 만나면서 또다시 새로운 운명이 싹트기 시작한다.

슬픈 운명의 만남이 드리운 에스프리

학교생활에 충실하던 중섭은 ‘야마모토 마사꼬’라는 학생을 보면서부터 마음속에 이는 갈등에 사로잡힌다.

중섭 보다 한 해 아래인 같은 학교 학생이었고 중섭이 그녀를 얼마만큼 짝사랑했는지는 정확치는 않으나 그들이 첫 데이트를 하게 된 것은 3년 후인 그가 3학년 때였다.

그런데 첫 만남에서 데이트가 이뤄지게 된 동기가 ‘중섭’이 ‘마사꼬’에게 요청해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잘 타는 내성적이었던 중섭을 잘 알고 있는 친구가 사랑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그를 보자 친구가 계교(計較)를 꾸며 두 사람을 연결하게 된다.

이 말을 하기 전에 잠시 당시 이중섭이 다니던 문화학원의 분위기를 살펴볼 필요가 알아본다.

중섭이 문화학원으로 옮겼을 당시 이 학교 1학년엔 ‘홍하구,’ ‘안기풍’, ‘이정규’, ‘이주행’ 등이 같이 학교를 다녔고 이들 중에서 홍하구는 함경북도 길주 출신으로 만석꾼의 아들로 대단히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홍하구’는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종섭’을 매우 좋아한 나머지 동경교외 아파트 하나를 얻어 중섭과 함께 생활한다.

그리고 이 아파트에는 당시 파리에서 그림으로 이름이 알려진 ‘쯔다 세이슈우’도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중섭’과 ‘하구’ 둘은 ‘쯔다 세이슈우’ 집을 찾아가 그림을 배우곤 했다.

특히 만석꾼의 아들인 ‘홍하구’는 ‘쯔다 세이슈우’의 생활비를 보태주면서 우정을 나누며 가까이 지냈다. ‘쯔다 세슈우’는 원래 오사카 지방의 부잣집 아들이었으나 그가 프랑스 여인과 결혼을 하자 집에서 원조를 끊어버려 생활고에 시달리는 것을 본 하구가 도와주게 된다.

이러한 관계로 셋은 깊은 우정을 나누며 홍하구와 쯔다 세슈우는 이중섭을 각별하게 대해준다. 그리고 이중섭이 그린 그림을 보고 매우 좋게 평을 해주며 장래에 주목받는 화가가 될 것이라고 자주 말하곤 했다.

이 무렵 ‘종섭은’ ‘야마모토 마사꼬’에게 연정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고백하지 못하고 혼자 냉가슴을 앓다가 자리에 누워버리는 지경에 이르러 홍하구는 종섭에 신변에 이상을 느끼고 궁금증을 갖는다.

하루는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누운 중섭에게 하구는 약을 사다주려고 “어디가 아프냐”고 묻자 중섭은 “어디가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픈 사랑의 병 같다”라고 실토한다.

용기를 낸 중섭은 자리에 누운 채 하구에게 “마사꼬라는 여학생을 사랑하고 있다”며 “오늘은 꼭 고백하려 마음을 먹고 나갔으나 여학생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말문이 막혀 목석이 돼 집에 뒤돌아오자 열이 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실 중섭은 마사꼬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지내온 일이 벌써 오래 전부터 품어온 애정 어린 감정이었다. 하구는 친구의 고백을 듣고 묘책이 얼른 떠올라 계획을 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중섭이 사랑하는 마사꼬도 중섭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홍 하구는 자기 생일날이라는 명분으로 어느 레스토랑에 두 사람을 초대하기에 이른다. 물론 그들 둘은 어느 상대가 나온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나오게 되며 그것을 계기로 그들의 사랑에 불이 붙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렇게 애태우던 사랑은 순탄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중섭은 일본제국이 지배하는 식민지 출신이기 때문에 마사꼬의 부모들이 이들 두 사람의 결혼을 절대적으로 반대하고 나서기 때문이다.

세월은 가슴을 조이는 어느새 이중섭은 1940년에 문화학원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신미술가회전’에 작품을 출품해 ‘특별상’과 1943년 같은 단체에서 ‘태양상’을 수상하게 되면서 일찍이 촉망받는 화가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월등한 실력으로 학교를 졸업하게 되고 중섭은 1945년도 초까지 프랑스 유학을 준비하는 등 동경에 머물면서 마사꼬와 사랑을 나누며 그녀 부모의 마음을 살피지만 그때까지도 그녀의 부모는 결혼을 반대하고 있어 마음이 돌아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먼저 고국으로 귀국하기로 맘먹는다.

시기적으로 전황(戰況)은 갈수록 일본이 불리해지고 미국의 B-29기가 동경을 불바다로 만들기 시작한다. 그해 4월 마사꼬의 일가족은 동경을 떠나 피난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이때가 기회라고 판단한 마사꼬는 큰 결심을 하고 부모 곁을 떠나 사랑하는 중섭에게 가기로 결단을 내린다.

대한해협을 건너는 마지막 배를 타고 부산을 거쳐 서울로 올라온 그녀, 사랑하는 남자 이중섭과 함께 있기 위해 무조건 현해탄을 건너오게 된 것이다.

하룻밤을 서울에서 지낸 그녀는 다음날 소공동 거리에서 우연히 중섭의 친구이자 문화학원 동기였던 ‘이정규’를 만나게 돼 한국에 먼저 와있던 중섭과 연락이 닿는다.

이때 중섭은 원산에 있는 몸이지만 정규의 연락을 받고 급한 발길을 서둘러 마사꼬와 극적인 만남을 이루게 된다. 그 후 이들 둘은 곧 원산에 사랑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마사꼬의 이름을 한국이름으로 개명해 ‘남쪽에서 온 덕이 많은 여자’라는 뜻으로 ‘이남덕(李南德)’이라 지어 부르기 시작한다.

그들은 얼마가 지나지 않은 그해 8월 해방을 맞는다. <중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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